‘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이것을 저는 ‘사귐의 영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과거에 ‘내주’ 혹은 ‘동거’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요즈음에는 ‘동행’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머물러 있는 상태도 중요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동거’와 ‘동행’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저는 ‘사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고 말씀하신 것도 모두 사귐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사귐의 영성’은 내면적으로 깊은 위로와 평안을 누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삶의 모든 영역을 뒤집어 놓는, 혁명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분을 모르다」중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국제 기독교’는 철저히 상업주의적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소유를 증가시키는 비법처럼 선전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적 기복주의와 결합하면서 질이 더 나빠졌습니다. 그 결과, 존재는 텅 비어 있으면서 받은 은혜와 축복과 기도 응답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에서 자신이 분리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예배로, 기도로, 말씀 연구로, 봉사와 선교로 분주했던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일평생 ‘충성된 종’이라고 생각하고 온갖 헌신을 다 바쳤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이 텅 빈 영혼이라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목사로, 선교사로, 장로로 혹은 집사로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모든 일이 끝나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존재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헛되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살다」중에서
저는 한국 교회의 희망을 ‘사귐의 영성’에서 찾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각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기를 지속하고 영적 사귐을 나누기를 지속해야 합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시간을 성별하여 주님 앞에 서기를 지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눈과 귀와 마음으로 주님께서 붙여 주시는 형제자매들을 환영해야 합니다. 교회로 모여 행하는 모든 일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에 집중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귐의 능력은 각 개인을 변화시키고 또한 교회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오직 그런 성도만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도구가 되고, 오직 그런 교회만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됩니다.
---「나가는 말_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