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은 아틀란티스를 찾는 데 보다 많은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고대에 '테라'라고 불린 산토리니 섬은 에게 해에 있는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이다. 에게 해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테라는 물 속에 잠겨 있는 산의 봉우리이지만, 이 산은 다른 섬들과는 달리 화산이다. 기원전 1450년경에 여기서 대규모 지각변동이 일어나 화산이 폭발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 가운데 가장 큰 폭발이었다.(...)
스피리돈 마리나토스(S. Marinatos)가 테라 섬을 발굴한 결과, 섬의 가장자리에서 깊이 쌓인 화산재와 속돌층(화산의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이루어진 가벼운 암석층-옮긴이) 밑에 묻혀 있던 미노아인의 주거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을 발굴한 결과, 채색 돌고래로 장식된 도자기 욕조, 초목과 날짐승이 주로 그려진 우아한 꽃병, 놀랄 만큼 크고 색깔이 생생한 프레스코 벽화 등이 출토되었다. 벽화에서는 파란 원숭이들이 빨간색과 노란색 밀림에서 까불며 장난을 치고, 앵무새들이 백합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두 젊은이가 용감하게 권투를 하고, 어부가 물고기를 우쭐하게 들어올리고, 정교한 선박들로 이루어진 작은 함대가 크레타 섬의 항구로 들어간다. 사람 뼈가 널리 퍼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화산 폭발이 있기 전에 한동안 지진이 계속되었으리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 지진은 주민들에게 빨리 피난을 떠나라는 경고의 사이렌이었을 것이다.
테라 섬의 분화는 에게 해의 고고학적 기록에 나와 있는 두 차례의 변화와 가까운 시기에 일어났다. 에게 해의 여러 섬에서 발견된 기원전 1450년 이전의 도자기는 미노아인이 만든 것이지만(이것은 크레타섬이 에게 해에서 상업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 이후의 도자기는 그리스 본토에서 만든 것이다(이것은 교역에 대한 지배권이 미노아인한테서 그리스인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증거다). 기원전 1450년 이전에 크노소스 궁전에서 작성된 재산 목록은 '선문자 A'라는 서체로 기록되었지만, 기원전 1450년 이후에 작성된 기록은 전혀 다른 서체인 '선문자 B'로 기록되었다. 아마추어 암호 기술자인 영국의 마이클 벤트리스와 그의 동료인 그리스 로마 학자 존 채드윅이 선문자 B를 해독한 덕분에 우리는 선문자 B가 그리스어를 표기한 음절 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선문자 A는 아직도 해독되지 않았지만, 그리스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표기한 문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스에서 제작된 도자기가 에게 해에 널리 퍼져 있고, 크노소스에서 장부를 기록할 때 그리스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리스가 에게 해의 상권을 장악했다는 증거이며, 그리스인들이 크노소스에서 정치적 권력과 군사적 지배권까지도 탈취했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도 테라 섬의 분화가 이런 변화의 무대를 장치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 그리스의 요새화한 궁전과는 달리, 크노소스의 궁전은 바다에서 쉽게 공격당할 수 있었는데도 본질적으로 무방비 상태였다. 하지만 다른 방어선이 그들을 보호해 주었을 것이다. 평소에 에게 해의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고 있던 미노아인의 상선들이 막강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지각 변동에 따른 화산 폭발이 거대한 해일을 일으켰다면, 그런 함대는 추풍낙엽처럼 침몰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담하고 공격적인 그리스인들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레타 섬을 공략하여 크노소스를 함락시킨 뒤, 그곳에 기지를 세우고 에게 해의 교역권마저 탈취했을 것이다. 불타버린 궁전의 유적은 그후 앙심을 품은 미노아인들이 지배자인 그리스인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반란의 증거인지도 모른다.
이같은 역사적 반전은 후세에 전설로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스인인 테세우스가 쓰러진 크레타의 미노타우로스 위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고, 바다에 삼켜진 제국은 사라진 아틀란티스 왕국으로 사람들의 상상 속에 계속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 pp 91~92
우르의 왕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을 이른바 '거대한 죽음의 구덩이'(Great Death Pit)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울리는 무장 호위병 6명과 여인 68명의 유해를 찾아냈다. 여인들 가운데 네 명은 하프를 들고 있는데, 한 여인의 손은 현이 있었던 곳에 아직도 놓여 있었다. 28명의 여인은 머리에 황금 리본을 달고 있었다. 다른 여인들의 두개골에는 자줏빛 가루 -염화은-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울리는 그들이 다른 금속으로 만든 리본을 달았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었다. 고대의 금속으로 만든 리본을 달았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었다. 고대의 금속 가운데 가장 오래가는 것은 금이지만, 은은 흙 속에 함유된 산성 물질과 접촉하면서 삭아버린다.
울리가 한 여인의 해골 옆에 무릎을 꿇었을 때, 지름이 8센티미터쯤 되는 납작한 잿빛 원반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허리와 거의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날 저녁, 막사로 돌아온 울리는 그 원반을 씻어 불빛으로 조사해 보았다.
그것은 은으로 만든 머리 리본이었다. 하지만 그 리본은 여인의 머리에 달려 있지 않고,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여인은 리본을 똘똘 말아서 주머니에 넣은 채 집에서 나왔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리본은 비교적 단단한 덩어리를 이룬데다 옷감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아주 좋았다. 리본의 섬세한 테두리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이 리본의 주인은 왜 리본을 머리에 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장례식에 늦는 바람에 제대로 몸치장을 할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장례식에 늦을까봐 걱정한 나머지 걸음을 서두르면서 그 궁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고 하프가 흙먼지 속으로 천천히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의 머리 속에 마지막으로 스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한밤중에 고고학자가 침상 옆의 등잔을 끄고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을 때, 밖에서는 한 줄기 바람이 일어나 우르의 도랑을 지나가며 소용돌이쳤다. 고대의 강물처럼, 시간 자체의 흐름처럼.
--- pp 45~46
바다에서 고대의 재물을 회수하려는 노력에는 특유한 위험이 따른다. 고대의 난파선들은 대부분 깊은 심해에 누워 있기 때문에, 잠수부들은 압축공기통을 메고 이론상으로 가능한 한계 깊이까지 내려가야 한다. 혼수상태(혈액 속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하여 정신이 흐려짐으로써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 공기 색전증(깊은 물 속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급히 수면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허파가 터지는 것),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잠수부의 건강을 좀먹는 감압증(수압이 급속히 줄어들어 혈액 속에서 질소가 거품을 일으키는 증상으로, 결국에는 신체가 영영 마비되거나 죽는 경우가 많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잠수부의 길동무들이다.
--- pp 113
과학자들은 컴퓨터 영상 합성 장치를 이용하여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수의에 찍힌 영상이 입체적 물체에서 투사되었다는 사실이다. 헝겊이 시체 위에 펼쳐져 있다고 상상하면, 영상이 가장 짙은 부분은 시체가 헝겊과 가장 가깝게 닿은 부분이고 가장 옅은 부분은 시체가 헝겊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시체가 헝겊과 가까울수록 그 시체가 헝겊에 남기는 영상은 그만큼 짙어진다. 시체의 영상을 만든 것은 시체 자체였고, 그 영상은 균일한 접촉을 통해서가 아니라 차별적인 복사열로 만들어졌다. 과학자들은 수의를 찍은 흑백 사진에 나타나 있는 명암의 변화를 이용하여 희생자의 얼굴과 신체의 윤곽을 복원할 수 있었다.
컴퓨터 분석은 또한 수의에 찍힌 영상이 완전히 무지향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시 말해서 그 영상은 그림붓이나 그밖의 장치가 움직여서 생긴 게 아니었다. 토리노의 수의에 찍힌 영상은 면밀히 조사하면 '도트 매트릭스'와 비슷하다. 농도의 차이가 생긴 것은 일부 섬유가 다른 섬유보다 색깔이 짙기 때문이 아니라, 색깔이 짙어진 섬유가 특정 부분에 더 많이 집중해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과학자들이 얼굴의 입체적 모형을 연구할 때, 두 눈 위에 부자연스럽게 융기한 부분이 특히 관심을 끌었다. 어떤 과학자들은 고인의 눈꺼풀을 닫고 있도록 시체의 눈 위에 동전을 올려 놓았기 때문에 그 부위가 부자연스럽게 부풀었을 거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이 부위를 예수 사망 당시의 동전과 비교해본 결과, 크기와 모양이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카고에 있는 로욜라 대학의 프랜시스 필라스(F. Filas) 신부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 부위를 삼차원적으로 확대해본 결과,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고대 동전에 사용된 도안'UCAI'라는 글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고대 동전에 새겨진 'TIBERIOU CAISARIS'라는 글자의 일부로, 예수 시대에 로마 제국을 다스린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황제를 가리킨 것이다.
이런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보면, 토리노의 수의의 영상이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수의에 찍힌 영상이 인위적인 것이라면, 그 누군가는 인체의 구조와 생리학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했을 테고, 또한 로마 시대의 십자가 처형 방식을 알아야 했을 테고,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의 동전을 입수해야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의 음화를 재현하는 영상, 사진의 도움을 받아야만 비로소 완전히 알아볼 수 있고 자연스러워지는 사람의 영상을 만들어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삼차원적인 컴퓨터 영상 합성 장치를 이용해야만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세부를 그림에 포함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복사열로 헝겊을 그을려서 그런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수단을 갖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 pp 164~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