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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328g | 140*200*16mm
ISBN13 9791198312938
ISBN10 11983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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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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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영정은 다시 웃고 있는 것 같다. 여자는 늘 웃었다.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영정 사진도 없었다. 아버지랑 함께 찍은 한 장뿐인 사진을 오려 확대했다. 사진 속 여자는 청순한 이십 대 그 모습 그대로 마냥 웃을 작정인가 보다. 네팔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여자는 그렇게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현실이 도대체 믿어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나, 몇몇 친구, 우리 친척들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 p.39

직장을 잃고 갈 곳은 없었다.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시체 놀이 시간이 많아졌다. 삶은 무기력해져 가고 있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통화 시간만 점점 길어졌다. 부담이 없었고, 무어라 탓하지 않았다. 정말 고모보다 더 고모같이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말하는 것 자체로 위로가 되었다. 차츰 편안했고,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사람의 정이 느껴졌다.
--- p.48

무언가 알아 가는 즐거움에 할머니는 그즈음 세상에 새로 태어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상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내 몸 어딘가에 가시처럼 반응하는 적극성은 충격이었다. 그랬다. 그것은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는 본능적 행동. 나 자신을 바로 세워 가야 한다는 다짐은 행동하게 했고,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 깊숙한 내면에 ‘나는 엄마다.’라는 강한 메시지가 할머니로부터 전해져 왔다.
--- p.93

남자가 사는 곳은 열악한 환경이지만 결코 열악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연을 누리고 사는 사람인지 모른다. 맑은 공기와 풍경은 온전히 남자 것이다. 계곡이 가까이 있어 천연수를 마음껏 사용할 수도 있다. 산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은 남자의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 p.118

문득 첫 남편을 떠올렸다. 딸의 아버지. 그의 얼굴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검은 형상 하나가 웅크린 짐승처럼 둥근 바퀴가 되어 천천히 굴러왔다. 마치 저 우주 밖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오고 있었던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딸의 아버지, 첫 남편의 제사도 잊고 있었다. 연관성을 잃어버려 단순해진 탓이다. 마치 발전한 도시를 보면서, 그 이전의 모습은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현실만 있었다.
--- p.145

거리는 텅 비었고, 인간관계는 기계 매체를 통한 목소리로 전달되고, 차츰 사슬이 끊기듯이 툭툭 잘려 나갔다. 결혼이 미뤄지고, 다시 취소되어 갔다. 과학자들은 이대로 간다면 서서히 인류는 사라질 거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이 사라진다면 끔찍하다. 사람이 사라진 곳에 짐승들이 살게 될지도 모른다. 공룡 시대와 같은 세상으로 돌아갈지도….
--- p.161

지안은 분조가 되어 담담하게 소설도 아닌, 자서전도 아닌 글을 써 내려갔다. 가끔 가릉가릉 숨소리를 내는 분조가 옆에 와서 소곤거리기도 했다. 어린 분조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렸고 머리에 똬리를 얹고 물동이를 올렸다. 조심조심 걷는 분조 어깨로 물방울이 한 방울 흘렀다. 물방울은 시간을 머금고 세월을 담았다. 멍석 위에서 혼례식을 치르고 다시 아이를 잃은 분조의 눈물이었다. 사랑도 건조했고, 아리고 아팠다. 질기고 고단한 삶, 끝내 밟아보지 못한 길로 분조는 걸어서 갔다. 어디든 걸어서만 갈 수 있다.
--- p.215

말소리가 굴삭기의 소음에 싹둑싹둑 잘려나갔다. 남자가 한 손으로 내려가라는 손짓을 했다. 알았다는 말을 명지는 손을 흔들어 대답 대신했다. 돌아오는 길에서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형이 죽었을 때 아버지가 삼 일을 먹지 않고 꺼이꺼이 울었다는….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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