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무크지 『아크』 7호의 주제가 ‘위로’로 선정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 호에는 어떤 ‘위로’의 글들이 실릴지 내심 기대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6호 ‘기분’ 발간 후 책을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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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 ‘나약한 정신으로 세상을 어떻게 헤쳐가?’ ‘지금만 견디면 금방 나아질 거야.’ 등등,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원망할 대상을 찾아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는 것조차 낡아버린 ‘희망’을 찾기 위해, 남용되고 있는 뻔한 위로 말고 진정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인문무크지 『아크』 ‘위로’에 실린 총 19편이 ‘희망’을 위한 ‘위로’의 길에 가닿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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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의 삶과 실존에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미래에 현재와 유사하거나 똑같은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그때에도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현재를 꾸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는 스스로를 구원하고 공동체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나와 타자를 위로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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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나 과학, 철학이나 예술이 하는 일들이 다름 아닌 이런 일이다. 인간은 큰 상처를 겪으면 본능적으로 모든 감각을 닫아버리게 마련인데 이때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감각을 열게 하고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고 그 세계를 ‘느끼게’하는 일도 바로 그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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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 용건을 교수에게 이야기하는데, 서러움 같은 게 올라왔다. 내 기억에 내 눈에 눈물이 비쳤던 것 같다. 운 건 아니다. 눈물이 조금, 아주 조금 올라왔다. ‘취재하러 온 사회부 기자가 이게 무슨 부끄러운 꼴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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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조언이 가장 게으른 대화다. 진부한 조언은 대화의 문을 닫을 뿐이다. 그저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 된다. 마음이 아프다고, 널 아끼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묵묵히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위로는 고통과 슬픔을 극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위로는 상대의 고유한 고통과 슬픔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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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피해자가 숨죽이고 사는 역사가 되풀이되어 왔다. 지금은 학살과 고문은 없다지만, 산업재해와 자연재해는 더 커졌다.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출신 청년들이 출신을 숨긴다고 한다. 원전 사고에 관련해서도 처벌받은 공무원과 책임진 도쿄 원전 간부가 없다고 들었다. 그렇게 권력과 정부라는 것은 비슷한 것인가. 오염수는 어떻게 할 건가.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사고를 치고는 그냥 버려두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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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연대는 나, 즉 개인의 불안, 고통,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공통정서, 즉 공감 능력이 함께 합니다. 그래야 연대 보증이나 공동 책임을 진다 해도,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나 자신의 언행을 절제하는 것이 억울하거나 희생당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가 자신을 절제하면서 나에게 배려하고 내 존엄성을 인정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어떤 ‘안전함’, ‘평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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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필 무렵』을 읽으면서 일상의 애틋한 위로도 의미 있고, 충렬사 의열각의 네 여인을 생각하면서 우러나는 전율의 위로도 의미 있다. 감성적 유희 속 위로도 이성적 사유 속 위로도 우리 삶에는 모두 필요한 것이다.
--- p.110
그런 산업유산이 산업화가 아닌 문화와 여가, 그리고 새로운 삶터라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인류에게 위로를 선사하고 있다. 더 큰 것으로 위로를 다시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 위로는 산업유산을 훼손과 파괴에서 지켜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 p.139
필자는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근대’ 역시 잘못된 시기라는 비판을 하고 고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 역시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긴 힘들다. 여기서 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결과를 떠나서, ‘근대’를 만들어 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성’에 대한 ‘이성적 자기반성’이란 ‘성숙한 태도’이다.
--- p.153
피카소의 회고처럼, ‘그의 모험은 철저히 고독하고 비극적’이었지만, 그의 고독(solitary)은 외톨이처럼 혼자(alone)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대(solidarity)하게 만든다. 위로(consolation)는 차별해서 홀로 두는 것(isolation)을 싫어하므로 함께(con) 하는 것이다. 정여울은 헤세를 일컬어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했지만, 고흐에게도 적합하다. 그는 ‘슬퍼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힘을 모아 승리하기를 권유한다. 그의 이름 빈센트(승리)처럼…
--- p.176
며칠 전 어느 동료와 세미나를 한 후, 걸어가던 중에 과거에는 문학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엘리트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과거에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문학으로 한정되었다면 요즘은 게임, 웹소설, 웹툰,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통로가 있다는 사실도 떠오른다. 그러니 문학만이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어폐가 있다. 이 말보다는 언어 예술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 p.193
고립과 단절의 시대에 다시 원형적 체험이 가진 미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가까운 공연장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 터무니없이 비싼 해외 유명 연주자의 공연만을 찾을 필요는 없다. 지금도 전국의 크고 작은 공연장에서는 함께 듣는 음악적 경험을 제공하는 정성 들여서 만든 공연들이 텅 빈 객석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자리에서 음악을 느끼고 감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 내면의 위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회적 위로와 예술 체험의 공적 경험이다.
--- p.205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정적 태도에 입각해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퇴행시키는 ‘거짓 위로’가 아니라,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역사적 진실을 인양하기 위한 ‘사유와 실천’이다.
--- p.217
바깥에서는 지옥을 손쉽게 이야기하는 판인데 집 안의 창가에 걸터앉아 명상하며 마음의 평안을 바라고 느리게 살기를 실천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사회적 약자이기 마련인 다수의 고통을 도외시한 채 나 자신만 ‘치유’받고, 나 자신만 ‘잘 살’면 된다는 발상은 되돌아보면 그 얼마나 끔찍한 것이란 말인가?
--- p.228
메이드 카페의 메이드들은 그 자신들이 어리숙한 존재로서 연기되고 있기에, 오히려 손님들에게서 위로라는 행위를 끌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손님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경험마저도 이 공간을 통해서 교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p.240
“누나, 가셨네.” 이 짧은 한 문장으로, 그동안 등을 무겁게 짓눌렀던 세상의 모든 고민과 설움들이 한순간 휘발되는 느낌을 받았다. 한 여자가 세상에 나올 때 덩달아 따라나섰던 검은 세계는 여자를 데리고 가면서도 여자에게 용서를 빌지 않았다. 여자는, 으레 그것이 삶이란 사실을 날 때부터 알았던 것처럼 울면서 나왔다 울면서 갔다.
--- p.251
삶의 무상함과 재앙과 유한성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는 영혼의 음식. 밥국은 내게 고백을 하게 한다. 상처와 위선과 내 안의 숱한 부끄러움을 마주하게 한다.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밥국엔 국밥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이 있다.
--- p.270
그늘은 그림자와는 다르다. 그림자는 광원 반대편에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말하지만, 그늘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며 주변의 여러 기운들과도 교우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그늘을 단순히 어둠이라 치부할 수 없다. 어둑해 보이지만 빛도 함께 머금고 있다. 어둠이면서 동시에 빛이고, 빛이면서 어둠인 것이 그늘의 속성이다.
--- p.277
크고 화려한 세상으로 이어진 다리가 정작 고립을 늘려가는 건 아닌지, 누군가에게는 다리가 그 자체로 섬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고민할 것이다. 그때서야 무력한 위로는 새로운 대교의 가장 빛나는 조각이 될 것이다.
---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