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바닷가 숲이 있었다. 그는 그 숲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소신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거대한 숲을 팔아치운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서였다. 그는 어느 날 결단을 내렸다. 마음 편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주는 사람에게 그 숲을 양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단, 부동산으로 팔아치워서 개인적인 수익을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 p.6
필리피노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자신,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무엇이 있나 생각해봤다. 그것은 ‘추방’이었다. 우리 인간은 아름다움에서 추방 중이었다. 아름다움을 스스로 추방하기도 했다. 우리는 화가라면 누구도 붓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지 않을 추한 그림의 일부, 지옥도의 일부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 생각을 하면 필리피노는 짐을 챙겨 떠나버리고 싶었다.
--- p.28
필리피노는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한 인간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빌로니아의 황금 정원을 사랑하던 여자. 젊은 왕의 광적인 야망에 동의할 수 없던 여자. 어디에 있든지 자신의 길을 갈 방법이 있다고 여전히 믿던 여자. 많은 생명의 죽음에 이미 울고 있던 여자. 어미와 새끼 동물의 죽음에 오래전부터 인간성의 많은 부분을 의문시하던 여자. 자기 방식으로 세상의 본보기가 되기로 마음먹은 여자. 이미 흘려진 피를 모아 신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로 마음먹은 여자. 가장 마음이 찢어지는 이야기들에서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내기로 마음먹은 여자.
--- p.31
사람들은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모두들 MBTI 같은 성격유형 검사나 점술에 매달렸고 서둘러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했다. “응, 내가 그래서 그렇다는군.” “네가 그래서 그래.”
나는 어쩌면 무사의 영향을 받아서 이 이야기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 이렇게 말했다. “너를 말하려면 네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말하라!”
--- p.37
나는 우리 몸에 대한 믿음, 우리의 손, 입술, 눈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의 카메라는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바라보는 눈과 쫄깃한 고기를 씹는 입술에 지나치게 길게 초점을 맞춰왔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는 먹는 이야기 말고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 pp.42~43
우포늪에 다녀온 뒤 고니 한 마리가 얼마나 하늘을 바꿔놓았던가 생각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고니의 수중 질주 소리가 반복적으로 떠오르자 마음속에 내가 머무를 새로운 장소가 생겼다. 이전에 나는 공허와 슬픔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과 슬픔 사이에 있게 되었다. 나는 매일 밤 그곳을 거처 삼아 쉴 것이다. 그러나 그해 고니는 다른 어느 해보다 많은 개체수가 순천만의 흑두루미와 함께 조류독감으로 폐사했다. 나는 논바닥에 누워 있는 흑두루미 사체 사진을 찾아보곤 했다. 고니, 흑두루미, 모두 눈처럼 별처럼 멀리서 온 단어였다. 알 수 없는 먼 곳을 연상시키는 그들의 여행은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어떤 사랑은 이 세상의 많은 일들에 반대하게 만들어. 반대하는 힘이 한 사람의 진짜 힘이야.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반대자가 될 거야. 사랑해.’
--- pp.49~50
“도대체 추도문을 몇 개나 쓴 거야?”
“정말 많이 썼어. 그사이 추도문 전문가가 되었어. 책임감을 위한 추도문, 양심을 위한 추도문, 관대함을 위한 추도문, 추방당하는 야생동물들을 위한 추도문, 공사장의 삽으로 잘려 나가는 도롱뇽을 위한 추도문, 살처분당한 동물들을 위한 추도문, 마지막 코뿔소를 위한 추도문, 몸이 똥으로 뒤덮인 채 죽은 펭귄을 위한 추도문, 멧돼지를 위한 추도문, 자라지도 못하고 팔려 나가는 나무들을 위한 추도문도 다 써뒀어.”
--- pp.58~59
그 시절엔 누구나 디스토피아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다. 말하자면 디스토피아의 시대였다. 신종 감염병 약간, 바이러스 약간, 산불 약간, 해수면 상승 약간, 이상기후 약간, 동물 멸종 약간. 감염병과 기후위기는 인기 있는 글과 영화의 재료였다. 그러나 그것을 삶의 재료로 받아들인 사람은 희귀했다. 적어도 너무 적었다.
--- p.63
“나는 지금이 위기 상황인 줄도 모르는 사람과는 더 이상 잘 수 없어!” 나는 적어도 지금이 황금시대이자 태평성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억울했다. “세상에 이런 이유로 결별하는 사람은 없어!”
--- p.67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들이 사는 마을을 찾았다. 한번 찾은 사람이 다음번에 장미 묘목을 들고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다. 이것은 신기한 일이고 신기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번 본 아름다움은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인류는 꽃이 피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꽃 핀 그늘 아래서 이야기와 사랑이 영원히 다시 시작된다.
---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