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나는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쓰면 내가 즐거워진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다. 아니, 사실 전해지지 않아도 좋다. 이미 이 책을 써서 읽고 있는 내가 즐거우니까. 자기 자신에게조차 재미없는 글이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게 읽힐 리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 읽고 싶은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독자로서의 글쓰기 기술’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요리해본 사람은 안다. 달리 먹어줄 사람이 없어도 나름 공들여 만들고 나면 기쁜 법이다. 물론 맛이 있으면 더 좋고. 그 음식을 누군가에게 대접했다가 연애를 하게 되거나 음식점을 차리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즐거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가짐이 바뀌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덮어버리는 차원이 아니다. 쓰는 행위를 통해 실제로 ‘내 삶이 바뀌는 것’이다.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겁고, 그로 인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놀랄 만큼 바뀐다는 것.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려고 한다.
---「시작하며」중에서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 목적의식이 있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결국 사람들이 읽지 않는 글이 나와버린다. 초보자라면 더욱 그렇다. 흔히 말하는 글을 통한 성공은 노력해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본연의 즐거움을 꾸준히 맛보며 스스로 빠져들어 쓰는 것. 글쓰기의 출발선상에서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다.
나는 이 사실을 강의 때마다 반복해서 말하곤 한다. 고맙게도 수강생 중 상당수로부터 “잘 알았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등의 감상을 듣는다. 하지만 그들의 깨달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음주 다른 강사 수업에서 다시 ‘화제가 되는 글을 쓰는 기술’ 등을 신나게 메모하는 모습들을 발견하니 말이다. 사람들은 너무 빨리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 같다. 무슨 원데이 콘택트렌즈도 아니고.
---「04. 글쓰기가 가진 본래의 즐거움을 놓치지 마라」중에서
글쓰기를 다룬 수많은 책은 대부분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정한 후 써라”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20대 여성의 마음을 울리는’이라는 접근방식으로 글을 쓰라는 건데, 그 방법을 아는 50대 남성이 있다면 실제로 20대 여성에게 인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걸 아는 남자는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글 따위를 쓰지 않는다.
“타깃을 상정하자”라니. ‘타깃’이라는 단어는 정말이지 저속하다. 애초에 글쓰기에 타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사격과 글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생각해보자. 애초에 특정한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안타깝지만 생각과 현실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내가 일한 광고업계에서 카피라이팅 업무는 ‘30대 여성에게 이 옷의 장점을 전하는 글을 써라’, ‘중학생이 이 과자에 흥미를 느낄 만한 말을 생각해라’ 같은 타깃론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을 들이는 광고도 결국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곳에 ‘놓여지는’ 것이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10. 타깃 따위는 없어도 된다」중에서
이 세상에 글을 쓰는 작업만큼 고된 일이 또 있을까. 차라리 풀코스 마라톤을 뛰는 편이 나을 거라고 본다. 매년 수많은 사람이 참가하는 도쿄마라톤대회에서 ‘달리고 싶은 이유를 1만 자 분량으로 쓰시오’와 같은 완주 조건을 단다면, 대부분 400자 정도 쓰다가 기권할 것이다.
나는 자발적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카피라이터 업무를 시작한 건 회사에서 그런 부서에 배치되었기 때문이었고, 영화평을 게재한 것도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지금 집필 중인 이 책도 의뢰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쓰겠다고 약속한 이상 무거운 허리를 일으켜 쓰기 시작한다. 하기 싫은 일을 조금이라도 유쾌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써서, 내가 읽고, 즐거운 기분이 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는 동안에 나 자신이 독자가 된다. 그렇게 쓰는 것은 혼잣말을 하고 그 말에 혼자 웃는 것과 비슷하다. 어찌 보면 바보 같지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독자를 상정해서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쉽고 간단하다.
---「12. 저는 제 글이 재미있는데요?」중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영화가 왜 재미있는지를 거인의 어깨 위에서 보면 평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카메라 앵글은 구로사와 아키라(일본의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의 스타일과 굉장히 비슷하지만, 한층 더 기교가 있다”라든가 “히치콕(영국의 영화감독) 감독의 영화 편집 기법을 발전시켰다”라는 식으로 쓰는 것이다.
앞서 말한 도서관에서 1차 자료를 찾으라는 이야기는 오로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기 위함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다는 것은 ‘여기까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다음을 이야기하겠다’라는 자세다.
---「19. 거인의 어깨 위에서 글 쓰는 법」중에서
한 편의 글을 쓰면 세상이 무척이나 넓어진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은 꽤나 어리석은 착각이다. (중략) 글을 쓰면 쓸수록 그 사람의 세계는 좁아진다. 물리학에 대해 떠들어대는 사람을 보고 주변에서 물리학에 정통한 사람인가 하고 착각하다가도, 그가 무언가를 쓰면 쓸수록 아니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글을 쓰는 건 일단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접한 사상은 당신만 알고 있다. 당신이 품은 심상은 당신만이 기억한다.
당신은 세상 어딘가에 작은 구멍을 뚫듯이, 작은 깃발을 세우듯이, 그냥 쓰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누군가가 그곳을 지나갈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 남긴 작은 흔적에 눈길을 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을 좁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당신의 세상을 넓혀준다.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 당신만의 세상을 구축함으로써, 틀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23. 언젠가 누군가는 당신의 글을 읽는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