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대해서 나 역시 사려 깊은 지성보다 애절한 감성이 앞서는 것도 인지상정 때문일까? 하지만 이 글은 고향이라는 언덕을 감성의 지팡이로 산책하는 것보다 지성의 곡괭이로 파들어가는 심정으로 쓰려고 한 것이다. 물론 내 향수의 서정은 글밭의 모든 이랑에 숨어 있다.
그러나 실은 고향이란 생각하고 써야 할 주제가 아니다. 있어야 하고 누려야 하고 쉬어야 할 곳이다. 그곳은 우리가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히브리 격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향에서 이따금씩 역사를 논하고 철학을 읊조리며 예언자 흉내를 내는 나는 귀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언자가 아니든지 또는 가짜 예언자임이 분명하다. 고향에는 집이 있다. 우리집은 새들이라는 긴 마을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면서 대청마루에 앉으면 괘관산(掛冠山)이 눈앞에 있고 뒤로는 뒷까끔이 있다. '관을 벗는다'라는 뜻의 '괘관'이란 말은 벼슬을 던지고 낙향한 선비들이 산을 보고 자기 심정을 토로한 작명에 기인한다. 그래서 나도 이 집으로 오면 모든 세속을 던진다. 그리고 오로지 추억과 자연 속에 파묻힌다. 250년이나 되었을까 부모님이 사시던 '소소가(蕭蕭家)'라는 우리 고가는 머물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집에는 가정이 있었고 있어왔으며, 그 가정은 추억의 박물관이다. 추억의 박물관을 열면 어머님이 계신다. 아! 어머니! 열여섯에 이 집으로 시집오시고 날 낳으시고 눈물과 사랑과 기도로 기르시고. 그리고 삼 년 전 저 줄감지 밭 아버지 곁에 묻히신 어머니. 내게 고향은 어머니요, 어머니는 고향이다. 나의 귀향은 어머님에로의 돌아감이며, 어머님의 사랑과 삶에로의 돌아감이다. 그것은 내게 유럽인이 이탈리아로 가듯, 동양인이 인도로 가듯, 근원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 주변으로 아버지와 할머니, 또 소꿉동무들, 그들과 하는 제기차기와 자치기, 피리와 물방개 잡기, 연날리기, 도토리 줍기, 고자배기 빼기, 토끼덫 놓기, 예배당 풍금 치고, 성탄절 새벽 찬양.
고향은 세속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자연과 정서로는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곳이다. 높이 솟은 괘관산, 안개 낀 뒷까끔, 그 위로 오르는 아침 안개, 도란거리며 흐르는 도랑물, 남으로 흐르는 구름과 호랑이 장가가는 소나기, 울창한 소나무숲과 그 속의 풍뎅이, 장수하늘소, 흰점박이하늘소, 평온한 들녁과 그 위로 나는 밀잠자리, 실베짱이, 그리고 북방거꾸로여덟팔나비.
고향에 올 적마다 반갑다고 여름에는 매미와 쓰르라미가 울며 온갖 산곤충들이 날아들고 겨울에는 굴뚝새들이 우리집 장독과 석류나무, 그리고 사철나무 사이를 짹짹거리고 다닌다. 고향은 나를 현실로부터 납치해간다. 아니 고향에 있으면 시간을 넘어선 영원의 세계에 온 듯하다. 이곳에는 과거가 현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