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과르디니는 성경 말씀을 매우 깊이 성찰하는 대가다운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과르디니가 단순히 신학적 성찰과 삶에 대한 조언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성적 사유와 일상의 삶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점을 그 누구보다도, 냉철한 이성과 그것을 탐구하는 열정에 기반한 성찰을 통해 생생하고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 p.5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겸손입니까? 그것은 힘의 덕입니다. 강한 사람만이 참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강요받지 않고 자유롭게 섬기며 자기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이 앞에서 고개를 숙임으로써 자유로워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겸손은 결코 인간에게서 생겨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생겨납니다. 맨 처음 겸손을 보이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이분은 너무 크셔서 그 어떤 힘에게도 해를 입을 수 없기에 겸손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위대함은 하느님의 본질이지만, 그분은 당신의 위대함을 겸손으로 낮추실 수 있으십니다.
--- p.36
제자들은 자신들의 이런 성격 때문에 아주 쉽게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갈”(마태 26,31)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주어라”(루카 22,32). 물론 여기서 사도들에 대해서만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우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주님을 배신할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나요?
--- p.81
이때 요한은 이분에게서 평범한 인간 존재를 넘어서는 그 무엇과 마주쳤습니다. 한 줄기 빛이 그의 영혼을 비추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와 유사한 체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 예수님과 매일 함께 보내면서, 지속적으로 그분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요한의 내면을 건드린 이 첫 번째 체험은 점점 더 심화되었고, 자신의 편지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거의 60년이 지나 노인이 되고 난 후에야 이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1요한 1,1). 요한은 이것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해서 말합니다.
--- pp.126~127
그리스도는 ‘유일한’ 신비이시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과 연관시키는 만큼, 그분의 빛 안에서야 비로소 올바로 보게 됩니다. 이 빛 안에 세상, 역사의 과정, 우리의 고유한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적인 온갖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빛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빛으로부터 모든 것, 전체, ‘현존재現存在’가 열립니다. 갇혀 있고 쓰러진 것과 탁 트인 넓은 전망이 다 열립니다.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쉬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p.169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우리의 파악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신비는 전적이며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신비를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과정에 포함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이 신비가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면, 우리의 사유가 붕괴되거나, 말을 통해 의미된 본래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이 알게 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 앞에서 침묵하고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신비로운 어떤 것입니다.
--- p.196
인간에게는 믿음과 다시 태어남을 통해 이 사랑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이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 형제자매와 맺는 고유한 관계의 모범으로 삼는 것이 허락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이 부과됩니다. 이것이 다음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 p.22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인간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심으로써, 이 인간은 온전하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도성이 ‘하느님에게서 내려옴’으로써, 도성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당한 본래의 중심을 획득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느님께서 본래 뜻하셨던 바가 완성됩니다. 그 뜻은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