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은 단어 그대로 집 안에서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한 일이다. 집마다 살림살이는 엇비슷하지만, 관리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각자 나고 자란 집에서 배운 게 있고, 들이는 노력의 정도와 반복하는 주기, 참을 수 없는 기준 등 성향에 차이가 있다. 대체로 누구에게나 좋을 것들과 나에게만 괜찮을 것들로 나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전자는 ‘근거’가 있어 설득할 수 있지만, 후자는 ‘취향’이라 서로 존중해야 한다. (김멋지)
--- pp.53~54
이상한 놈인데, 잘 맞는다. 얘랑 사는 동안은 오늘처럼 웃겠지. 언젠가 할머니가 되어 가장 좋아하는 꽃무늬 바지를 입고 밤막걸리를 병째로 홀짝이며 함께 키득거리는 상상을 했다. 역시, 좋다. (김멋지)
--- p.67
각자 부모님 집을 떠나 한 지붕 아래 들어선 날이 기억난다. 온기 없는 집에 멀겋게 서 있자니 현실이 밀려왔다. 언제든 퍼낼 수 있는 흰쌀 가득한 쌀통과 각가지 반찬으로 가득한 냉장고는 더 이상 없었다.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는 월급이 없는 프리랜서의 삶에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휴대폰비, 보험료는 물론 가스, 전기, 수도 요금과 식비까지 따라붙었다. 먹고, 쓰고, 자는 것까지, 그 모든 게 실시간 돈으로 환산되는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멋지)
--- p.70
같은 공간 안에서 이토록 다른 무드로 공존할 수 있음에 문득문득 놀란다. 동시에 그 가볍고도 묵직한 존재감이 날 놀랍도록 환기시킨다. 아무도 가두지 않았건만 스스로가 옭아맨 좁은 방에 갇혀 홀로 안달복달할 때 그는 그러려니…… 심드렁하게 스쳐가며 나의 방에 구멍을 낸다. 창문을 내준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깊이 빠져드는 나를 늪에서 건져올린다. 그가 하려던 것이 아님에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만다. (위선임)
--- p.167
그래도 내가 차박차박 세팅해두고 간 것들 덕분에 하루를 버텼다며 희미하게 웃는 멋지. 하루 종일 내 퇴근만 기다렸단다. 다행이다 싶다. 녀석이나 나나 하루하루 나이 들어갈 텐데, 몸뚱이 유지보수할 일이 많을 텐데, 이럴 때 서로가 없다면 얼마나 고될까. 얼마큼이나 외로울까. 침대에 걸터앉아 누운 멋지의 등을 토닥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선 끝에 여전히 문턱을 사이에 두고 주차되어 있는 의자 두 개가 걸렸다. 어쩐지 멋지와 내가 서로 의지하는 저 바퀴 달린 의자 두 개 같았다. (위선임)
--- p.187
멋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눈물은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근원도 없다는 걸. 실체가 없어 이름 붙일 수 없는 울음이라는 걸. 문제가 없는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의미 없다는 걸. 그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담백한 온도의 위로는, 이 모든 걸 이해하는 멋지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위선임)
--- p.216
우리가 기념하는 명절은 스트레스보다는 기쁨이 더 크지 않을까. 내가 선택한 친척,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명절을 나는 늘 기다린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지금처럼 느슨하게 이어져 있을 거라는 믿음이 충만하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 아니, 얼마나 더 좋을까? 외려 기대된다. (위선임)
--- p.257
절정에 달하지 못하는 기승(전)결이지만 항상 진심으로 다퉜다. 비에 젖은 종이가 우글쭈글해져도 결국 마르면 단단해지듯, 우리 사이는 서로의 눈물에 엉겨 젖었다 마르길 거듭하는 동안 굳건해졌다. 어떤 감정이든 인정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아무리 화나도 이 관계가 조각날 거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나중에 혹 우리가 다른 집에 살게 되더라도, 다른 가족이 생긴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우린 서로가 단단하고 든든할 것이다. (김멋지)
--- p.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