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던 나는 단순히 이런 생각부터 했다. 골프를 시작하려면 무엇보다 골프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누가 보면 바보 같은 시작이라고 할지 몰라도, 그 바보가 어떤 선택을 끝까지 이어가는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렇게 나는 버스에서 내린 뒤 무료로 배포하는 지역신문을 구해 적당한 중고 골프채가 있는지부터 찾아보았다. 마침 100달러(당시 환율로 약 6만 원)에 나와 있는 중고 골프채 세트를 발견했다. 당시의 나에게도 크게 부담이 없는 가격이었다. 바로 판매자에게 연락해 찾아갔더니 연세 지긋한 백인 할아버지가 골동품처럼 보이는 골프채 세트를 건네주었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골프채였다. 무게감이 나가면서 햇빛에 번쩍이는 은빛, 싸구려 골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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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자만이라는 마음가짐 하나로 나는 인생의 중대한 기회를 한 번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삶이 다시금 조금씩 궁지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 PGA 트레이니십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은 내 머릿속에 없었고, 그렇기에 떨어진 뒤에 대한 계산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자만심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던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탄탄대로만을 상정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꼴좋게 무너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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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준 이상의 평균 스코어를 유지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합격자 중 적지 않은 수의 추가 탈락자가 매해 생겨났다. 나는 이 3년 동안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았고, 가까운 친구들조차 거의 만나지 않았다. 모든 여가 활동을 포기한 채로 일하고 경기하고 공부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결국 나는 21명의 합격자 가운데 3년 만에 이 과정을 수료한 최종 8인의 명단에 들었고, 그렇게 프로 골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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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으로부터 듣는 칭찬이 자신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스스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지녀야 보다 지속적이고 건강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자신감과 자존감에 대한 차이를 언급하고 싶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못지않게, 어떤 결과와 연결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자존감’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대로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힘. 나는 그것이 자존감이라고 믿는다. 골프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에서 항상 좋은 성적만 낼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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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식당에서 버는 시급만으로 학비까지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때 내가 유학하던 대학의 한 학기 학비는 우리 돈으로 420만 원 정도였다. 6개월 정도 어학연수 후 대학에서 한 학기를 지낸 뒤의 방학 즈음, 수중에는 140만 원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학생비자로는 일주일에 20시간만 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음 학기의 학비는 물리적으로 마련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때, 내 생애에서 손꼽을 만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호주에 처음 건너와 어학원을 다닐 때 재미 삼아 친구들을 따라가 본 적 있는 카지노를 떠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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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와 골프는 도망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인생도 마찬가지다. 쉽게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숨을 수 있는 곳은, 그리하여 시간을 유예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저 정면으로 바라보고 마주해야만 했다. 링 위에 갇혀 경기를 펼치는 권투선수는 한순간도 싸움을 멈출 수 없다. 더 이상 펀치를 날리지 않는다거나 등을 돌린다는 것은 지기 위해 그곳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그렇게 멈춘 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도망칠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도망칠 곳이 없으니, 도망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1번 홀 티 박스에 오르기 직전 이렇게 자기암시를 하기 시작했다. “자, 피하지 말고 목표하는 방향만 보고 힘껏 펀치(샷)를 날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 펀치를 멈추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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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에 나는 시니어투어에 출전할 수 있는 나이, 즉 50세가 되어,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 열리는 KPGA 챔피언스(시니어)투어 선수 선발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호주프로골프협회 소속 프로인 나에게는 한국에서 참가하는 첫 번째 공식 경기였다. 경기를 앞두고 또 다른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내 염두에는 어떻게 잘 준비해서 경기에 임할까 하는 생각보다, 고국에서 처음 참여하는 경기에서 망신을 당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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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에서건 인생에서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힘 빼기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나 인생의 변곡점에서 아등바등 힘을 주었을 때보다 뭔가 다 내려놓은 것처럼 힘을 뺐을 때 그 일은 더 옳은 방향으로, 즉 순리대로 풀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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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내내 감정을 숨겨야 하는 골프 규칙 같은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가 너무 한 지점에 생각이 매여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더불어 그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꼭 불쾌한 일만은 아님을. 그리고 그 표출된 화가 오히려 솔직하고 투명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나는 동유럽식 욕설과 한국식 욕설 사이에서 예상과는 다른 동반자의 티 없이 맑은 면모를 발견했고, 그 라운드는 결국 즐겁게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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