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도, 감사하게도, 반동의 나에 머물지 않고 일말의 반성을 하고 난 이후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이 시대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미니즘은 남녀 구분 없이 우리 모두에게 반동을 넘어 반성을 지나 연대로 가는 길일 뿐이라고. 아주 작고 소박한 출구일 뿐이라고.
--- pp.28~29
페미니즘은 여성도 남성같이 힘과 권력을 가지자는 것이 아니다. 과도기적으로 권력을 가져야만 바꿀 수 있다면 수단으로서는 가질 수 있겠지만 궁극에는 다 같이 힘을 빼자는 것이다. 힘과 권력의 개념 정의를 다시 하자는 것,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아도, 못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것, 뺌으로써 더할 수 있는 다른 셈법을 가져보자는 것, 돌고 돌아 다시 남성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구분 없이 다른 차원의 세상을 향해 가자는 것, 좀 더 공상해 보면 남녀 구분 없이 ‘헤아리는 더듬이’를 가진 새로운 종의 출현을 기다려보자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페미니즘의 깊이이다.
--- p.30
수염 없는 삶을 택하겠다는 작은 의지 하나 수용할 수 없는 사회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 버림받아 보아야 한다. 세상에서 버려져야 할 것은 그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자체이다.
--- p.37
인간의 직관과 이해, 연민은 경험을 넘어서는 것, 내가 너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인 적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주러 왔으리라.
--- p.42
절대자의 뜻이 궁금합니다. 신성한 믿음을 도외시하는 이를 그래도 애처롭게 여기는 신이 있다면 그에게는 성령이나 천사가 아니라 사람을 보낼 것 같았거든요.
--- p.86
그 신은 안과 밖을 구별하지 않았고 남과 여의 차별을 참고 살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머무는 것을 적극적으로 죄 삼음으로써 바깥으로 나오려는 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다. 어떤 자동차는 출발시키지 못하도록 부속품을 훔쳐내는 이를 용서하며, 독신의 성직자로 하여금 맘껏 세속의 사랑을 출발시키라고 독려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신이 있다고,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 자신을 낮추는 신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p.92
‘목요일: 이브의 후신인 여자, 나가서 일하겠다고 덤비더니 곧잘 함. 힘센 남자에게 세상을 맡기는 것보다 세상이 한결 부드럽고 평화로워짐. 집 안팎에서 힘들어하는 예쁜 것들을 위해 임신을 남자에게 맡길까 고려 중. 나의 도화지는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 안의 그림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현명한 이들이 알아주어 참으로 기특함.’
--- pp.113~114
모든 사람이 동류의 평균적인 사랑을 하고 그에 따른 보통의 결혼생활을 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의 생로병사나 사계절, 우주의 순환과도 흡사한 사랑의 흐름을 호흡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반쪽이 아닌, 온전한 하나가 되려는 개체들이 만나 험난한 세월의 파도를 함께 넘어보는 것. 어쩌면 절대자에 대한 희구가 아닌 단순한 인간 대 인간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성숙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 p.122
진리를 탐구하는 데엔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랬다. 한 사람은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 위해서. 토론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토론으로 사회가 진보한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절실히 바란다. 아줌마들이 건전한 판단과 잘 걸러낸 단어들로 세상을 말하기를, 그 말들이 다시 그들의 정신을 자극하여 거룩하게 행동하기를, 그래서 경찰이 아줌마라고 무사통과시키지 않는 날이 오기를.
--- pp.183~184
김초엽의 작품 속 존재들은 성이 지워진 채 유기체로서 삶을 살아간다. 두 가지 성(性과 姓) 모두 여간해선 드러나지 않는다. 여전히 약자와 소수자가 존재하고 차별과 배제가 남아있고 약탈과 희생이 따르고 장애와 고통이 선명하지만, 전 우주로 공간이 확장되고 미래로 시간이 확장된 김초엽의 세계에서 두 성이 지워진 존재들은 한결 숭고한 차원의 고민을 한다. 숭고한 고민의 세계로의 초대가 김초엽의 미덕이다. 그 묵직한 초대가 고맙기 그지없다.
--- pp.291~292
이 세상에 수많은 차이가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 교수와 강사, 정년보장 전임교수와 비정규직 계약제 교수, 서울대와 비서울대, 대졸과 고졸, 중졸, 국졸, 무학,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가족이 많은 자와 혼자 사는 자, 남자와 여자. 관건은 이 차이들에 따른 차별, 개인이 느끼는 부당함과 모욕감이 얼마나 그의 가슴을 짓누르느냐 하는 것이다.
--- p.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