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화면에 읽을 수 없는 영어 글자들. 띵, 부팅음이 들리고 한참을 기다리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윈도우 98’의 로고가 뜬다. 화살표 모양의 마우스 커서는 모래시계로 변했다가 다시 화살표로 변하기를 여러 번. 칙칙한 회색 바탕이 창을 가득 채운 모니터 속의 세계. 나는 숨을 죽이고 눈앞에 펼쳐질 이상하고 낯선 세계를 기다린다.
--- p.7
그렇게 나는 다시 게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동안 게임 세계를 떠나 있었던 탓에(혹은 덕분에) 내가 즐길 게임은 무궁무진했다. 「보더랜드」, 「폴아웃」, 「바이오쇼크」, 「엑스컴」, 「매스 이펙트」, 「어쌔신 크리드」… 심지어 이 대부분의 게임들이 시리즈물이었다!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이 낯선 세계들은 모두 달랐고, 각각 새롭게 생생했다. 놀라움 투성이였다. 게임 하나를 열심히 하다 질리면 그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러다 엔딩을 보면 그 시리즈의 이전 작품이 대기 중이었다.
--- p.13
그날 모하비 황무지를 달려 라스베이거스의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해 지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수상한 인공지능과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컴패니언 로봇, 황무지를 달리는 배달부를 생각했다. 게임 속 세계가 실재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상한 느낌이었다. 물론 「폴아웃 뉴 베가스」 속 모하비 황무지와 뉴 베가스와 후버댐은 실제와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나는 분명한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이 장소들을 언젠가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생생하게 경험했던 것 같았다. 오래전 이미 이곳에 와본 것 같았다.
--- pp.16-17
나는 그 가상 세계 속에 심긴 공들인 거짓말들을 눈여겨 살핀다. 현실과 조금쯤 이어진 사소한 조각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비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세계에 마음을 준다. 그러면서 상상한다. 어느 다른 우주에서는 정말로 이 인간 문명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 위를 식물들이 뒤덮은 다음, 자가 조립된 기계 짐승들만이 지상을 유유히 거닐겠지.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린 문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인간들조차 남아 있지 않겠지. 하지만 그 세계는 분명 아름다울 텐데. 지금 이 톨넥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비슷할까?
그 꿈은 종료 버튼을 누르면 깜빡하고 흩어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 겹 세계 위에 있다.
--- pp.40-41
그런 의미에서 게임이라는 매체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가장 유사한 경험을 주는 게 아닐까. 어떤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하면 ‘제대로 본 게 맞냐’는 타박을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게임 스토리를 불완전하게 이해한 채로 엔딩을 봤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경험에 우선순위가 있고, 서사는 후순위인 매체인 것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 삶(세계)을 살아볼 수 있다. 일단 경험한 이후에 그 경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주어진 미션을 완수하고, 지나가는 NPC들에게 말을 걸고, 일기와 오디오 로그를 수집했을 당시에는 그 행위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다가 일지를 살펴보며 뒤늦게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게임이 끝난 후에도 그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냥 까맣게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 그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그 조각들이 사실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 pp.51-52
나는 게임 속에서 낯선 공간을 통과하고 횡단하며 내달린다. 때로는 멈추어 서서 여기저기 흩어진 이야기 조각을 수집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자판기에서 쨍그랑 떨어진 캔을 줍고, 부서진 건물 파편 틈을 들여다본다. 문득 내가 무작정 나아가다가 놓친 것이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고, 한편으로는 아직 발견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 소설을 쓸 때 한 번씩 그 즐거움을 되새겨본다. 생생함, 정말로 이 공간에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 그것이 내 이야기를 읽는 독자에게도 조금쯤은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 p.55
「투 더 문」 시리즈를 십 년간 따라왔던 경험은 나에게 이야기의 힘과 게임의 가능성에 대해, 무엇보다 픽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 기쁜 경험이었다. 「파인딩 파라다이스」에서 닐 와츠 박사는 말한다. “가끔은 우리의 기억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허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는 허구와 진실에 대해 치열하게 묻는다.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 기만인가 아닌가, 그 질문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또 다른 질문들을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가 허구를 옹호하고 있다고 느꼈다. 때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허구와 진실은 구분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허구도 진실만큼이나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른다고.
--- p.68
그래서 나는 「디스코 엘리시움」이 이렇게 묻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무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종말론이 뒤덮은 사상의 폐허 같은 이 세계에서,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상을 뒤쫓을 것인가? 게임은 그것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선택지를 줄 뿐이다. 어차피 고정된 사건은 변하지 않고, 해리가 할 수 있는 대단한 일은 없으며, 해리는 오직 내적 독백과 발언만으로 미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가, 플레이어가 이상을 좇는 이들의 편을 잠깐이라도 들어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 일은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해리와 플레이어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바꾼다.
--- p.89
그렇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면, ‘좋은 게임’이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했다면, 그 몰입감은 여전히 큰 기쁨을 준다. 나는 중독성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싶다. 계속하고 싶은 게임을 할 때 나는 매우 단순해진다. 수많은 생각들, 나를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 순간 내 세계에는 게임 속의 목표밖에 없는데, 심지어 그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의식마저 점차 사라진다. 일종의 명상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나는 현실 차원에서 분리되고, 완전히 다른 세계의 다른 목표에 풍덩 빠졌다가, 다시 현실적 조건-내일의 마감, 뻑뻑한 안구, 허리 통증, 갈증, 배고픔 등?에 의해 끄집어내진다. 이 차원을 오가는 과정에서 나의 생각하는 방식, 그러니까 사고 모드가 전환된다. 정신을 깨끗이 빨아서 말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신의 먼지를 한 번 팡팡 털어내는 느낌이 든달까.
--- p.108
삶을 게임처럼 살 수는 없다. 게임은 실패를 용납하고, 때로는 용납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실패에 훨씬 가혹하고, 한번 떨어지면 끝이다. 부러진 팔은 좀처럼 붙지 않고, 떠나버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며, 했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 게임에서 실패해도 되는 건 리플레이가 있고, 실패와 미숙함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현실의 실패와 미숙함에 대해서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래도 만약, 정말 쉽지는 않겠지만… 그 믿음을 아주 조금 빌려온다면, 무언가 달라질까.
---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