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네메시스〉라고 부를 만한 분신이 한 명씩 있다. 이 사람은 영혼의 형제가 아니라 영혼의 적이다. 둘은 만나는 순간 서로를 알아보고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이것이 그들의 삶이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최악의 적이 최고의 스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p.65
「양들은 무리를 이룰 때 한 마리 한 마리의 지능을 단순히 합한 것보다 훨씬 높은 지능을 발휘한단다. 저들의 힘은 바로 집단에서 나와. 〈에그레고르〉에서 말이야. 너한테는 생소하게 들릴 이 단어는 라틴어 에그레기우스egregius에서 파생된 말이야. 일상에서는 군집 본능, 다시 말해 무리를 이루려는 본능을 가리킬 때 쓰이지. 양 떼의 에그레고르가 바로 저들의 힘이야.」 --- p.24
오늘날의 인류도 눈을 가린 채 벼랑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누군가 나서서 ─ 그게 나일 수도 있지 ─ 인류가 방향을 틀어 최악을 피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지도 몰라. 니콜이 크게 심호흡을 한다. 결국 인류는 영문도 모른 채 거대한 체스보드 위를 움직이고 있는…… 폰들에 불과해. --- p.65
모니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한다. 두 소녀가 손을 맞잡는 순간, 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 든다. 그들이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순간, 모니카가 상대를 와락 끌어당겨 바닥에 넘어뜨린다. 그러고는 위에 올라타 무릎으로 팔을 눌러 꼼짝 못 하게 한 다음 두 손으로 상대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다. 손끝에서 핏줄이 팔딱팔딱하는 게 느껴진다. 모니카가 있는 힘껏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 p.110
방금 받아 적은 내용이 이 세계의 변화 방향을 보여 주고 있어. 보비 피셔는 왕으로 추앙받길 원하지 않았던 게 분명해. 아직 나는 피셔처럼 최고의 자리에 오르진 못했지만 언젠가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날이 분명히 올 거야. 그건 내가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야.가능하다는 인식만 있으면 돼. 그걸로 충분해. --- p.125
니콜 오코너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녀가 여행 가방에서 체스보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말들을 보드에 정렬한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벌어진 사건들을 떠올리며 말들을 움직인다. 백폰들이 적진의 타깃 하나를 에워싼다. 흑폰 하나가 보드 위에서 사라진다. --- p.221
「……당신 둘이 체스를 한 판 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물론 이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차원이에요.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