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푸코 작품 약어
머리말 들어가며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1982년 5월 31일~6월 26일) -첫 번째 강연 -두 번째 강연 . 프랑스어 버전 . 녹취 버전 -세 번째 강연 . 프랑스어 버전 . 영어로 된 두 번째 버전 초반부 -네 번째 강연 -다섯 번째 강연 세미나(1982년 6월) -첫 번째 세미나 -두 번째 세미나 -세 번째 세미나 -네 번째 세미나 옮긴이 해제 찾아보기 |
저미셸 푸코
관심작가 알림신청Michel Paul Foucault
미셸 푸코의 다른 상품
코는 주체의 계보학, 주체와 진실의 관계, 고대 그리스-로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라는 세 차원에 힘입어 토론토 강연의 주제를 정할 수 있었다. 요컨대 지극히 특수한 유형의 자기 인식과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주체를 구축한 자기 관계를 기술하고, 그리스도교 초기 몇 세기에 (특히 수도원 공동체에서) 자기해석학 - 푸코에 따르면 수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러 측면에서 여전히 현대 우리의 것으로 존속하는 자기해석학을 탄생시킨 역전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 p.16~17쪽 푸코는 토론토에서 파레시아의 정의로 설명을 시작하는데, 파레시아를 행사하는 장을 정치 영역으로 확장해 파레시아에 위험 개념을 도입한다. 파레시아는 윤리와 정치 영역에서 진실을 말하는 자유인 동시에 의무다. 요컨대 파레시아는 말하는 자가 그의 말을 듣는 자 혹은 자들(민회, 군주, 피지도자)보다 권력이 약하고, 그로 인해 말하는 자가 이 진실과 긴밀하게 결부된 것으로 보임에 따라 그에게 위험을 발생시킬 수 있는 상황으로 특징지어진다. --- p25쪽 푸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의 분석과 더불어, 주체와 진실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연구를 개시하는 것을 볼 수 있어 놀랍다. 주체와 진실이 맺는 새로운 관계 형식은 타인에 대한 진실을 그 타인을 마주보고 말하는 것으로, 푸코의 마지막 연구에서 거의 독점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 p26쪽 저는 사유의 차원에서 또 고대 문화 전반에서 ‘자기 돌봄’의 계율이 항존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항존은 심층적 혁신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특히 제정 시대에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확인된 형태와 판이한 형태를 자기 돌봄에 부여하는 자기 실천의 전성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자기와 관계는 복잡하고 항상적인 활동이 됩니다. 이 활동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과 관련해 비판의 대상, 투쟁의 장, 병리의 중심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 이외 어떤 목표도 갖지 않는 이 활동이 고독한 활동은 아닙니다. 이 활동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영역과 항상적 접촉에서 전개됩니다. --- p67~68쪽 저는 이 시대, 즉 제정 초기에 자기 돌봄이라는 주제를 특정 철학적 독트린에서 찾아선 안 된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합니다. 자기 돌봄은 보편적 정언 혹은 지극히 일상적인 계율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체와 규칙 그리고 방법을 갖춘 실천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개인적 경험의 양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의 수단과 형식을 갖춘 일종의 집단적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 p91쪽 오늘 제가 설명하고자 한 것은 자기 돌봄이 플라톤 이후 제정 초기까지 두세 번 주요하게 변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변화는 자기 돌봄이 성인의 수양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강조하고자 한 점은 이런 자기 수양과 〔새로 출현하는 기능〕의 밀접한 관계입니다. 세 번째는 이 자기 수양에서 그노티 세아우톤(자기 인식)이 점하는 위치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 p92쪽 자기 수양의 이런 실천 형태에는 종종 수련, 훈련, 금욕이라는 의미의 일반명사 아스케시스askesis가 쓰입니다. 무소니우스 루푸스는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삶의 기술techne tou biou도 이론적 교육mathesis만으로는 배울 수 없고, 실천과 수련askesis을 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 p102 2) 자기 실천은 자기 인식과 연결돼 있습니다. (중략) 오늘은 미래에 대한 채비로서 자기 실천을 분석하고, 자기 인식의 어떤 형태가 이 미래에 대한 채비와 연결돼 있었는지 모색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기 인식을 기억과 연결하기 일쑤죠. 그건 아마도 플라톤주의의 간접적 영향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그리스도교의 영향이고, 정신분석의 현재적 효과이기도 합니다. 자기해석학은 언제나 우리에게는 다소간 과거의 해독解讀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자기 수양에서, 시간과 맺는 전혀 다른 관계 내에 자리 잡은 자기 인식의 형태를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 p103-104쪽 서구 문명에는 주요한 두 유형의 수련이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지향하는 수련이 있는데, 그 목적은 하나의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지향하는 수련이 있는데, 그 목적은 진실〔진리.옮긴이〕을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세계와 우리가 맺는 관계의 규칙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 세기 동안 서구의 문화는 이 두 수련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지향하는 수련이 완전하게 전개된 최초 형태는 이교의 ‘자기 수양’에서 발견됩니다. 현실을 지향하는 수련이 완전하게 전개된 최초 형태는 그리스도교의 자기 테크놀로지에서 발견됩니다. 이 두 수련이 완전히 양립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둘은 대개 뒤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유형의 〔수련〕 사이의 긴장으로 우리 문화의 여러 특질, 양상, 위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p124쪽 오늘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진실의 자기 수련이 갖는 그리스도교적 형태가 ‘격언적gnomique 자기 인식’의 통일성을 산산조각 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교적 형태가 서로 다른 두 유형의 관계를 낳았습니다.) --- p155~156쪽 화용론적 담론 분석 관점에 입각한 인식의 역사, 고백의 역사와 관련해 파레시아 개념은 아주 좋은 사례이자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대 전반에 걸친 파레시아의 변천 과정을 추적할 의도는 없습니다. 강연에서처럼 기원후 1-2세기에 관심을 집중해 레시아의 고전적 의미와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대략적으로 기술해보고자 합니다. 이 두 세기를 선택한 이유는 파레시아가 이 기에 자기 돌봄〔배려.옮긴이〕의 기술과 대단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257~258쪽 제가 지금 저 자신이 하는 바를 특징짓기 위해 화용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과거에 저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30초 앞두고 평생 한 일을 정확히 말해야 한다면 진실한 담론의 화용론적 역사를 연구하려 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 p316~317쪽 |
푸코 사유의 중대한 변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텍스트
이 책에 담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 강연은 푸코 사유의 세 가지 중대한 변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데서 주목할 만하다. 그 첫 번째 변화는 주체의 문제와 관련되고, 두 번째 변화는 진실의 문제와 관련되며, 세 번째 푸코가 분석하는 역사적 범위와 관련된다. 우선 주체의 문제, 주체화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게 된다. 주체가 권력-지식 메커니즘에 의해 구축되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뿐 아니라 주체가 일련의 자기 테크닉을 통해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도 관건이 된다. 이로써 푸코의 연구는 근대 서구 주체의 계보학에 속하게 된다. 두 번째 변화는 진실 말하기가 주체성의 근간이 된다는 점이다. 진실을 말하는 행위,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와 타자에 대한 진실 말하기를 통해 주체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구축한다. 그러면서 진실 말하기의 형태에 과오의 고백(그리스도교의 죄의 고백), 파레시아(위험을 감수한 용기 있고 때로는 불손한 진실 말하기)가 중심에 들어온다. 마지막은 푸코가 분석하는 역사적 범위가 고대 그리스-로마, 특히 자기 수양의 황금기인 1-2세기 로마제국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주체성 모델과도, 근대 주체성 모델과도 다른 주체화 실천과 주체와 진실과의 관계를 발견해낸다. 자기 돌봄과 자기 인식의 시소게임 고대 그리스-로마 시기에 자기 돌봄은 자기 인식에 흡수·통합되었다가 로마제국 제정기에 삶의 형태가 된다. 자기 돌봄은 이제 단순히 정치적 삶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돌봄을 통해 주체는 자기 자신과 관련해 비판의 대상, 투쟁의 장, 병리의 중심지가 된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로의 이러한 회귀는 이후 그리스도교의 자기 수양에서 자기 자신의 포기로 귀결된다. 그 이전의 자기 수양에서 개인은 자기 변화로 진실에 도달하지만, 그리스도교 자기 수양은 다른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체는 세계와, 자기 자신과 분리된다.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해석함과 동시에 자신을 해석해야 하는 이중의 해석에 직면하게 되고 여기에서 자기해석학이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푸코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의 자기 돌봄과 자기 인식을 이론적 담론의 차원이 아니라 자기 실천, 자기 테크닉, 자기 테크놀로지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명상, 파레시아, 글쓰기, 상기 등 일상생활의 테크닉을 통해 구축되는 주체의 구조는 이후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백 테크놀로지로 변화해간다. 이 강연은 고대의 자기 수양과 그리스도교의 자기해석학이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드러내면서, 긴밀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이지만 교대하며 우위를 점하는 자기 돌봄(자기 배려)과 자기 인식, “너 자신을 돌보라”와 “너 자신을 알라”는 정언의 끊임없는 시소게임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기 인식이 자기 돌봄의 우위에 서고,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 철학에서 이 경향은 막대한 중요성을 갖게 됐다는 점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비판적 태도의 계보학을 구성하는 단계로서의 ‘파레시아’를 발견하는 단초 푸코는 이 책의 전반부에 담긴 일련의 강연과 하나의 총체를 구성하는 네 차례의 세미나에서 ‘파레시아’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긴 시간을 할애한다. 파레시아는 윤리와 정치 영역에서 진실을 말하는 자유인 동시에 의무다. 그는 이 세미나를 통해 파레시아를 세 가지 상이한 맥락에서 연구한다. 하나는 모든 시민이 자신의 생각을 동료 시민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로,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맥락이다. 다른 하나는 군주에게 고문이 파레시아를 발휘해야 한다면 군주는 자기가 듣게 될 불쾌할 수도 있는 진실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끌어오는 군주제의 맥락이다. 마지막은 사람들이 파레시아스트(파레시아를 행하는 자)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의 문제가 제기되는 자기 돌봄(자기 배려)의 맥락이다. 이 책을 편집한 앙리 폴 프뤼쇼와 다이넬레 로렌치니는 이 세미나에서 발견되는 파레시아 연구는 푸코의 다른 연구 작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의 분석과 더불어, 주체와 진실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연구를 개시하는 것을 볼 수 있어 놀랍다”라고 평한다. 그 새로운 관계란, 타인에 대한 진실을 그 타인을 마주보고 말하는 것으로, 푸코 말년의 거의 독점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 후반부의 세미나는 당시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흥미를 끈다. 영어권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언어적 어려움을 드러내고, 학생들과 아이디어를 교감하고, 스스로 질문하는 푸코의 교사로서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철학자의 사상과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