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처럼 몰려오는 비구름과 쏟아지던 우박들, 종일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야만 했던 5천 미터의 고개 등. 그 옛 사진을 들춰보며 지금도 떠돌고 있음을, 이 한 생에 어떤 사진을 남길 수 있을까를 잠시 생각해 본다. 비록 구부러졌고 뒤틀렸을지라도 불법에 의지했던 한 생의 풍경 사진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며. 길 위의 한 생, 좋은 추억 사진 한 장 정도는 남기고 싶기에.
--- p.18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 이것이 인도인들의 유전자를 지배하는 ‘지은 것’을 뜻하는 ‘까르마karma’, 즉 업業이다. 그리고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 ‘그럼 죽음 이후에는?’이라는 문제다. 만약 죽음으로 이 업이 모두 사라진다면 ‘내가 지은 것을 내가 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업과 윤회는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모든 세계 종교가 강조하는 사회적으로 행할 도덕적 의무인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강조해도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각기 달리 해석한다.
--- p.44~45
‘왜 이슬람교도들은 불교도들을 그토록 핍박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아무래도 당시 불교도들의 상가가 ‘약탈할 것이 가장 많아서’, 그리고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가 컸기 때문이리라. 당시 계율戒律이라는 조직의 규범을 갖춘 ‘출가 공동체’인 상가는 전 인도에 걸쳐 자신들만의 집단을 꾸리고 있었다. 이 조직을 통해 저항하기 시작하면 ‘더 느슨한’ 힌두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 p.65
‘불교는 어렵다’라고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도 이 연기법이 바로 불법의 근간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사성제·팔정도·오온 십이처·십팔계·오위백법 등 펼치면 천수천안을 가진 관세음보살의 손가락처럼 무수하게 늘어나는 게 불법이지만, 쥐면 한주먹인 게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인 연기법, 오직 이 하나이다. 고정불변하는 속성을 가진, 즉 자성自性을 가진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그저 상호 의존적인 것일 뿐이라는 이 연기법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후 불법의 핵심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 p.74
유부·경량·유식·중관이라는 이 4종 교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중관사상에서만 전면에 내걸고 있는 ‘두 가지 진리’라는 주제는 인도-티벳 불교의 전통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이것은 일체 무자성에 근거를 둔 언설로 표현 불가능한 연기 실상의 세계(진제)와 언설로 된 희론戱論의 세계(속제)라는 ‘두 가지 진리’라는 개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일체 무자성=연기=공성’이라는 항상 움직이는 세계를 언어·개념·정의 등으로 고정하는 언설의 세계로 전환하는 순간,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주목·강조하고 있다.
--- p.89
티벳 불교에서는 ① 작作·행行·요가·무극상요가라는 4종의 딴뜨라, 즉 4종의 밀교의 구분법을 쓰는데 이것은 일상의 생활을 관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작행요가·무극상요가’로 줄일 수 있는 이것의 작作은 산스끄리뜨어 어원 ‘끄르k?’에서 온 것으로 무언가를 하는 일반적인 행위를 뜻하고 ② 행行은 산스끄리뜨어 어원 ‘짜르car’에서 온 것으로 예식 행위를 뜻한다. 그리고 ③ 요가나 ④ 무극상요가는 요가 수행이나 집중 수행을 가리킨다.
--- p.95
한역 경전권에서 ‘감출 밀密’자를 써서 밀교密敎라 불리는 딴뜨라tantra는 명백하게 드러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敎, 즉 현교顯敎와 쌍을 이룬다. 밀교에 비하자면 경론과 이에 대한 세세한 주석을 따르는 현교의 배움은 각각의 그 근기에 따라 고만고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밀교는 스승과 제자 간의 법의 전승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과 함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법맥을 강조하는 선불교와 닮은 점이다.
--- p.105
중국·한국·일본의 한역 경전권과 함께 대승 불교의 양대 축을 이루는 티벳 불교는 불법승의 삼보三寶가 아닌 사보四寶에 귀의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을 지키고 베푸는 ‘출가 공동체’, 즉 불법승의 삼보야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승僧을 스님으로 생각하는 한국의 풍조와 달리 티벳 불교에서는 이 삼보 앞에 법을 전해주는 스승들을 앞에 두어 ‘나모 구루브야namo gurubhya’라고 스승들에 대한 예찬·조복·귀의 등을 먼저 한다.
--- p.116~117
한문 경전권 불교나 티벳 불교, 아니 모든 불교가 기복과 신행을 최고로 친다면 여타 종교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지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다른 종교와 구별되고, 특히 대승 불교가 ‘더불어 사는 삶’에 강조의 방점을 찍는다면 남방, 또는 소승이 추구하는 아라한의 길과 차이가 난다. 부처님을 복혜양족존福慧兩足尊이라고 부르듯, 티벳 불교가 강조하는 공덕이 복덕과 지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그리고 공덕의 제일은 공성을 깨닫는 지혜라는 점을 명심한다면 신행의 중심이 곧 지혜의 체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p.129
티벳에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실크로드 간선 가운데 하나인 이곳을 거쳐 티벳 고원으로 곧장 올라가면 ‘회색의 땅’을 뜻하는 싸꺄Sa skya 지역으로 연결된다. 바로 이런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티벳어로 이곳을 ‘호만탕lho smon thang’이라고 불렀다. 수도 라싸의 중산층 표준 발음법으로 쓰자면, ‘호멘탕’ 정도 되는데, 남쪽을 뜻하는 ‘호lho’, ‘풍부한, 풍족한’을 뜻하는 ‘멘smon’, 그리고 ‘평원, 평지, 땅’ 등을 뜻하는 ‘탕thang’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남쪽의 풍요로운 평지’를 뜻한다.
--- p.133~134
지수화풍공의 오대, 즉 다섯 가지 요소 또는 그 성격을 표현하는 색체의 상징 가운데 땅, 즉 지地는 황색, 물인 수水는 흰색, 불인 화火는 붉은색, 바람인 풍風은 녹색, 그리고 허공인 공空은 청색으로 표현된다. 즉 이 다섯 가지 색채의 조합으로 3계 6도를 도상으로 표현하는 만다라가 완성되고 그 밖에 힘·권능의 검은색 그리고 새로움의 노란색 등을 합하면 불교 도상학이 뜻하는 기본적인 색의 대략적인 그림이 완성된다.
--- p.145~146
실크로드 선상의 유서 깊은 산중도시인 오시Osh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도시 한 가운데 솟아 있는 돌산인 술래이만산Sulayman Mountain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이곳이 인도의 마지막 통일 왕조인 무굴제국의 시조인 바부르Babur가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도로 남하하며 ‘천하통일의 서원’을 세운 곳이었다. 오늘날 국경으로 막혀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안디잔Andijan 출신인 그는 당시 실크로드 선상의 주요 도시인 이곳 바위산에 올라 ‘천하 일통’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 p.196~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