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의 잔액을 떠올리고, 나는 300g짜리 한우 안심 대신 미국산 토마호크를 한 팩 샀다. 500g이 넘는 살덩어리에 근막과 긴 뼈가 붙어 꽤나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마트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에서 포장용 랩을 벗겼다. 3월 말이라서 바람이 싸늘했다. 아이스크림 막대를 쥐듯 암소의 뼈를 움켜쥐고, 나는 살점을 뜯어 먹었다. 그러면서 걸었다. 고기는 달콤하고 고소했으며 어금니 사이로 아삭거렸다.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즐거워 키들거렸다.
--- pp.9~10
달빛을 향해 폴짝 뛰었더니 허리가 구부러지면서 내 몸이 호를 그렸다. 물구나무를 서서 손바닥으로 착지하는데 스슥 하며 마당의 풀잎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90도로 허리를 틀어서 두 발로 일어섰다. 오래 훈련을 거듭한 리듬체조 선수가 그리하듯이.
--- pp.45~46
그 밤, 내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나의 왼손이었다. 검지뿐 아니라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과 손목 그리고 팔꿈치까지가 황갈색 털들로 뒤덮여 있었다. 새까만 털들이 그 사이를 지나며 우아한 무늬를 장식했다. 앞발처럼 생긴 왼손 하나가 내 머리통만큼 컸다. 나는 그것이 옆집 남자의 가슴을 치는 걸 봤다. 퍽, 하고. 딱 한 번 버르장머리를 가르쳤다.
--- p.49
나는 젓가락으로 신선한 회를 다섯 점 집어 양념도 찍지 않고는 꿀꺽 삼켰다. 눈 깜짝할 새 접시 하나를 비웠는데도 성이 안 차서 광어의 머리를 손으로 잡고는 물어뜯었다.
“혹시…… 신들린 분이셔?”
부동산 업자가 무당의 귓가에 소곤댔다.
“신이 들리긴, 그냥 신이셔.”
--- p.73
박수무당이 목공 장인의 큰 손을 잡아서 내 손바닥에다 얹었다. 그 순간.
“우와…… 이게 뭐야?”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들이 눈앞을 휘리릭 스쳐 갔다. 화려한 영상이 돌풍처럼 내 몸을 떠밀어 뒷걸음질을 쳤다. 잽싸게 다가와, 박수무당이 내 등을 받쳐줬다. 달리는 기차처럼, 무수한 영상과 소리가 내 몸을 통과했다. 그러다 어느 찰나에 멈춰 섰다. 마치 어떤 역에서 급정차를 하는 듯이.
--- pp.84~85
순간 내 왼손 검지의 손톱이 움찔했다. ‘분노를 조심하세요. 특히 억울함에서 싹트는 분노를…….’
박수무당의 음산한 말투가 귓가에 울렸다. 아아, 못생겼다는 말이 억울해 호랑이 손톱이 반응을 한 거구나! 그때 깨달았다. 누구의 일을 돕더라도, 그게 온전한 나의 선의여도, 그 일에 완전히 공명해 억울해하지 않으면 호랑이 모드로 변신하지는 않는다. 그럴 땐 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 pp.136~137
“그 사람한테서 손 떼!”
그대로 달려가 뒤돌려차기로 덩치의 목을 찼다. 모랫바닥에 퍽 소리를 내면서 덩치가 쓰러졌다. 그는 작은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깊은 신음을 흘렸다. 희뿌연 먼지가 공중에 흩날렸다.
“와…… 이게 되네.” 좌우로 목을 꺾으며 감탄하는데,
“저년이!”
사장 뒤쪽의 또 다른 덩치가 달려왔다. 나는 재빨리 움직여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했다. 사내는 주먹을 뻗으며 달려왔고 나는 교묘히 물러나 손날목치기로 그의 턱 밑을 후려쳤다. 윽, 소리를 남기고 두 번째 덩치가 쓰러졌다.
--- pp.137~138
“무당……이라고 해야겠지. 이게 한자를 풀면…….” 나는 종이에 무巫 자를 거꾸로 썼다. “하늘과 땅의 이치를 연결해 준다는 뜻이야.”
삼색 볼펜의 빨강을 켜서 하늘과 땅을 뜻하는 두 선을 덧칠했다.
“그럼…….” 여자가 티슈로 코를 풀었다. “여기 이거는 뭐예요? ‘사람 인人’ 자가 두 개 있는데.” 나는 오른손 검지로 人 하나를 가리켰다. “이건 나야. 그리고 이건 당신.” 나는 펜을 꼭 쥐고 두 사람 사이의 기둥을 덧칠했다.
“여기, 이 벽에 가로막혀서 답답해 울고 있지. 무당이란, 그 벽 너머로 손을 건네어 붙잡고 오도록 돕는 자야.”
--- p.166
궁금해 속이 타니까 두 귀가 쫑긋 섰다. 동네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서 빚어낸 소음들, 그 다양한 짜증과 분노가 내 귀로 밀려왔다. 찌릿한 고통에 놀라 나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마치 안테나가 특정한 전파를 수신하듯, 내 손님의 슬픈 목소리가 그 모든 소음들 사이로 올라왔다.
--- p.173
“그럼 아직…… 나, 호랑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찢어져라고 웃는 내 입술 위로 희고 긴 수염이 돋아났다가 사라졌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하늘을 날 듯했다. 작은 날개처럼, 두 귀가 쫑긋 섰다. 겉에는 황갈색 털이, 안쪽엔 하얀색 털이 순식간에 돋아났다.
“이것 보라고. 네가 얼마나 미숙한 천방지축인지.”
--- pp.240~241
호랑이 영혼과 헤어져 평범한 인간이 되는 건 싫었다. 100명의 한을 풀어주는 건 아무래도 좋고, 200명 300명의 한이라도 힘닿는 데까지 풀어줄 수는 있지만, 그 결과 도로 인간이…… 그것도 20대 여자가 되는 건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어제만 해도 그랬다. 병실에서 털 빠진 왼손 검지를 보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 공포를 느꼈다. 경찰시험에 떨어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주카페를 그만두고, 엄마 말마따나 어디 이사를 가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사람들 한을 못 풀어주었으니, 영원히 호랑이 영혼과 함께 살 텐데.
---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