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키녜현상이 일어나면, 난 어김없이 묘한 기분에 젖는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중간. 뭔가 아주 먼 옛날 일이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느낌. ---「선잠」중에서
고스케 씨가 부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에 부인이 있고 없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오만하게 혹은 아주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식으로밖에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선잠」중에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은 미치도록 선량을 동경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불량에 이끌리고, 그리하여 결국, 선량과 불량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평생 선량을 동경하고 불량에 이끌리면서 살아간다. ---「선잠」중에서
“고스케 씨.”
“응?”
그리운 목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 나는 눈을 감았다. 추억이 밀려와 현기증이 인다.
“이건 이별 전화에요.”
내 목소리는 의외다 싶을 만큼 차분했다.
“그러니까 이제, 꿈속에 나타나지 않아도 돼요.”
“…….” ---「선잠」중에서
바람-. 유쾌한 단어는 아니지만, 정말 그렇게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동시에 여러 남자에게 마음이 가는 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건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글자 그대로, 순전히 바람이다. 나는 신지에게 녹신녹신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바람피우는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됐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인간은 바람을 피우지 않곤 살 수 없는 생물이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전심전력으로 녹신녹신해진 채 태연히 살아갈 순 없다. -「녹신녹신」에서
신지가 말했다. 신지의 “그래?”는 묘하게 밝은 한숨과 닮아 있다. 밝은 한숨이라는 표현도 이상할지 모르지만, 예를 들면 “자.” 하고 일어날 때와 비슷한 느낌. 무언가를 싹 잘라내는 듯한……. 신지가 “그래?” 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다. ---「녹신녹신」 중에서
“사랑받은 사람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일도 비밀에 부쳐진 일도, 전부 그곳에서 해방되는 거죠. 거기까지. 다음은 아무것도 없는 해방.” ---「시미즈 부부」중에서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인간은 생각대로 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중에서
인생은 즐기기 위해 있는 것이고,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보고 싶을 때 봐야 하고, 그때가 아니면 갈 수 없는 장소,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 마실 수 없는 술,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게 있다.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