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녀가 이러이러하게 커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키우려는 것은 어느 부모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들의 나약한 면을 포함해서, 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등교 거부를 하는 아이는 학교에 가는 것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 수만 있다면 학교에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가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싫은 일을 겪었거나 인간관계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학교에 가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등교 거부는 그런 공포감과 압박감이 복통이나 두통이라는 모양으로 신체에 나타나서 아이의 기력을 꺾어 놓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열일곱 살인 B양의 자살. 가족에게 이 이상 괴로울 수 없는 사건에도 분명히 ‘의미’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살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양의 죽음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미 일어난 일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미래를 더욱 나은 것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등교 거부나 비행이나 출발점은 똑같습니다. 자기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 주는 존재, 자기를 사랑해 주는 존재가 없다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등교를 거부하며 집에 처박혀 있는 아이나, 집에 있지 못하고 비행으로 줄달음치는 아이나 모두 마음속에 커다란 두려움을 품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지요. 등교 거부를 하는 아이는 그 두려움을 없애려고 가족들에게 마구 화를 내는 것이며, 비행으로 줄달음치는 아이는 밖에서 그 울분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가 자기의 행동에 반응하며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등교 거부라든지 성적이 좋지 않다든지 하는 ‘행동의 그 부분(doing)’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본질 즉 ‘존재 그 자체(being)’에 눈을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넌 내게 소중한 존재다.’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해 주고, 그것을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에는 원래 초조함과 불안이 따르기 마련 아닐까요? 자신의 초조함과 불안을 꾹 참아 견디며, 따뜻함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정해진 시간 안에 결과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천천히 기다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한 마리 양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초조해하지도 체념하지도 않으면서 기다릴 시간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기대하는 이상형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이들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100%가 못 되면 제로와 같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어른들은 교활한 편이지요. 자기 자신의 경우는 50%가 되든 30%가 되든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아이들에게는 100%를 요구하니까요. 그러한 자신의 교활함을 깨닫게 되면 아이들에게 잘난 척하거나 큰소리를 칠 수 없으며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러니저러니 하고 비난할 수 없게 됩니다.
수영장에서 일어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 4년 동안이나 그 애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맏아이도 몇 번인가 수영장 속에 떠밀었다가 건져 낸 일이 있는데, 맏아이에게는 그렇게 수영을 가르쳤거든요. 둘째 아이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사소한 상황의 차이로, 혹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차이로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는 걸 몰랐어요. 어린아이들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다른 감성을 지닌 존재임을 잊고 있었던 거지요.
이전에는 누군가가 제 자식에 대해 칭찬하면 ‘천만에요. 그렇게 착한 애가 아니에요. 제게 얼마나 못되게 군다고요.’라며 겸사하였지요. 속으로는 기뻤지만 그렇게 겸손한 척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식은 부모의 작품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만약 아이에게는 그 아이만의 인격이 있다고 깨달았다면, 자기 아이가 칭찬받았을 때도 솔직하게 ‘덕분이지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겠지요. 그것은 결코 교만이 아닙니다. 부모가 겸손해서 자기 자식에 대해 나쁘게 말할지라도 해도 아이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알아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기를 정말로 그렇게 나쁘게 보고 있다고 믿어 버리지요. 저는 지금까지 솔직하게 ‘감사합니다. 덕분이지요.’라고 말할 수 있는 엄마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누구 앞에서도 당당히 제 자식을 칭찬해 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자기 자식을 칭찬해 주는 엄마가 있으면 ‘아이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 멋진 엄마이시군요.’라고 말해 줄것입니다.
아무리 거친 파도가 일어난다 해도 바닷속 깊은 곳은 고요하듯이, 괴로운 일이 있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하는 것, 평범한 생활에서 만나는 작은 조화로움이나 가족과 나누는 일상적인 평화처럼 이제까지 당연하다고 여겨 온 ‘은혜’로 눈길을 돌리는 것…. 이 책에 나온 일곱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녀가 이러이러하게 커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키우려는 것은 어느 부모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들의 나약한 면을 포함해서, 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등교 거부를 하는 아이는 학교에 가는 것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 수만 있다면 학교에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가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싫은 일을 겪었거나 인간관계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학교에 가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등교 거부는 그런 공포감과 압박감이 복통이나 두통이라는 모양으로 신체에 나타나서 아이의 기력을 꺾어 놓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열일곱 살인 B양의 자살. 가족에게 이 이상 괴로울 수 없는 사건에도 분명히 ‘의미’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살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양의 죽음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미 일어난 일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미래를 더욱 나은 것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등교 거부나 비행이나 출발점은 똑같습니다. 자기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 주는 존재, 자기를 사랑해 주는 존재가 없다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등교를 거부하며 집에 처박혀 있는 아이나, 집에 있지 못하고 비행으로 줄달음치는 아이나 모두 마음속에 커다란 두려움을 품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지요. 등교 거부를 하는 아이는 그 두려움을 없애려고 가족들에게 마구 화를 내는 것이며, 비행으로 줄달음치는 아이는 밖에서 그 울분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가 자기의 행동에 반응하며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등교 거부라든지 성적이 좋지 않다든지 하는 ‘행동의 그 부분(doing)’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본질 즉 ‘존재 그 자체(being)’에 눈을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넌 내게 소중한 존재다.’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해 주고, 그것을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에는 원래 초조함과 불안이 따르기 마련 아닐까요? 자신의 초조함과 불안을 꾹 참아 견디며, 따뜻함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정해진 시간 안에 결과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천천히 기다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한 마리 양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초조해하지도 체념하지도 않으면서 기다릴 시간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기대하는 이상형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이들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100%가 못 되면 제로와 같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어른들은 교활한 편이지요. 자기 자신의 경우는 50%가 되든 30%가 되든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아이들에게는 100%를 요구하니까요. 그러한 자신의 교활함을 깨닫게 되면 아이들에게 잘난 척하거나 큰소리를 칠 수 없으며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러니저러니 하고 비난할 수 없게 됩니다.
수영장에서 일어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 4년 동안이나 그 애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맏아이도 몇 번인가 수영장 속에 떠밀었다가 건져 낸 일이 있는데, 맏아이에게는 그렇게 수영을 가르쳤거든요. 둘째 아이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사소한 상황의 차이로, 혹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차이로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는 걸 몰랐어요. 어린아이들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다른 감성을 지닌 존재임을 잊고 있었던 거지요.
이전에는 누군가가 제 자식에 대해 칭찬하면 ‘천만에요. 그렇게 착한 애가 아니에요. 제게 얼마나 못되게 군다고요.’라며 겸사하였지요. 속으로는 기뻤지만 그렇게 겸손한 척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식은 부모의 작품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만약 아이에게는 그 아이만의 인격이 있다고 깨달았다면, 자기 아이가 칭찬받았을 때도 솔직하게 ‘덕분이지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겠지요. 그것은 결코 교만이 아닙니다. 부모가 겸손해서 자기 자식에 대해 나쁘게 말할지라도 해도 아이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알아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기를 정말로 그렇게 나쁘게 보고 있다고 믿어 버리지요. 저는 지금까지 솔직하게 ‘감사합니다. 덕분이지요.’라고 말할 수 있는 엄마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누구 앞에서도 당당히 제 자식을 칭찬해 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자기 자식을 칭찬해 주는 엄마가 있으면 ‘아이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 멋진 엄마이시군요.’라고 말해 줄것입니다.
아무리 거친 파도가 일어난다 해도 바닷속 깊은 곳은 고요하듯이, 괴로운 일이 있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하는 것, 평범한 생활에서 만나는 작은 조화로움이나 가족과 나누는 일상적인 평화처럼 이제까지 당연하다고 여겨 온 ‘은혜’로 눈길을 돌리는 것…. 이 책에 나온 일곱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