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회화에서 사람들은 진경산수와 속화가 지닌 사회 변혁적 기류를 읽어내고, 그것이 이 시기의 중요한 미술적 동향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사실인즉 그렇고, 특히 시대 분위기 내지는 현실의 직접적 반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게 해석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진경산수와 속화라는 즉물적 사고의 뒤안에 서려 있는 철학적 · 관념적 사고로서 문인화풍이 공존하고 있었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철학적 · 정서적 뒷받침에서 즉물적 사고는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겸재의 진경산수와 현재의 남종문인화를 그런 면에서 대비시켜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겸재에게는 존재론적 사고가 우위를 차지한다면, 현재에게는 인식론적 사고가 앞선다. 겸재에게는 개별성 · 사실성 · 현실론이 중요했다면, 현재에게는 보편성 · 관념성 · 원칙론이 중요했다. 겸재는 대상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면, 현재는 그 대상의 성격을 보편화시키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그림 형식에서 겸재는 묵법보다 필법을 중시한 데 비해, 현재는 필법보다 묵법을 중시한 이유도 사실은 여기게 있었다. 그것은 양자의 강점이자 곧 특징이기도 하다.
--- p.54
어용화사 단원 김홍도는 어느새 명류(名流)가 되어 있었다. 30대에 단원의 화명(畵名)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1779년 단원 35세 때 홍신유가 단원에게 시를 지어주면서 쓴 발문에서 "단원은 나이 30도 안 되어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이 남으니 무릇 하늘이 준 재주의 높음이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또 그에게 그림 주문이 얼마나 쇄도했는가에 대해서는 표암이 「단원기」에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세속이 김홍도의 뛰어난 기량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요새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이에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 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門)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단원의 명성과 밀려드는 그림 주문은 진신(縉紳)간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저간의 분위기는 신광하(申光河, 1729~1796)가 지은 「정대부가 김홍도에게 그림을 요구하는 시에 부침」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내용인즉, 정대부(丁大夫: 丁範朝로 추정)가 「산수 · 풀 · 벌레 ·새 그림을 얻기 위해 김홍도에게 보내는 노래」라는 걸화가(乞畵歌)를 짓자 신광하가 이 시를 보고 읊은 것이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정대부가 그림 그려 달라고 청한 노래를……
내 듣자 하니 화사 김홍도는 요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옛 사람도 그의 그림 솜씨 따르기 어렵다 하네.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관문을 넘어갈 제
좋은 비단 뒤에 싣고 채찍을 날리며 말을 달렸다지.……
---pp.184~186
같은 관념성을 지향하면서도 현재는 정서의 심화를 추구하였다. 그의 그림에 서려 있는 깊이가 바로 그것이다. 능호관은 관념산수를 통하여 높은 도덕과 정신적 고양을 추구했다. 그의 그림에 감도는 삼엄한 기상이 그것이다. 이에 반하여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였다. 그것은 낭만적 반항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흔히 예리한 감성은 이성의 힘을 능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데 호생관에겐 그런 호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리한 감성이란 이성적 사유와 도덕적 행위에 기반을 두지 않을 때는 사실상 객기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낭만적 반항의 허점이다. 호생관에게는 그런 허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은 더더욱 몰랐다.
--- 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