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어려서부터 지우개를 좋아했다. 작고 말랑한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그러면 어디선가 옅은 수평선이 나타나 가슴을 지그시 눌러주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 p.8
소리는 뭔가 발설하고픈 욕구를 느꼈다. 어쩌면 혼자 너무 오랫동안 무거운 비밀을 지켜온 탓인지 몰랐다. 소리는 말하고 싶었다. 누가 들어도 명백한 거짓 같아서 모두 웃어넘길 수 있는 진짜 이야기를. --- p.18
순간 지우가 풋 하고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본 표정 중 가장 밝은 얼굴이었다. 지우와 헤어진 뒤에도 소리는 종종 그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막 엄청난 사랑에 빠졌거나 한 건 아니었다. 소리는 그저 그 미소를 한번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바람이 어떻게 끝나는지, 혹은 어떤 시작과 다시 이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 pp.67~68
지우는 제 속에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음을 알았다. 강렬한 경험이지만 여전히 해석이 잘 안 되는 몇몇 기억 때문이었다. 지우는 그걸 이야기로 한번 풀어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고, 직접 말했을 때보다 그림으로 그렸을 때 훼손되는 부분이 적은 어떤 마음을. --- p.82
지우는 만화 속 ‘칸’이 때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네모난 울타리처럼 여겨졌다. 둥글고 무분별한 포옹이 아닌 절제된 직각의 수용. --- pp.118~119
소리는 가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꿈과 깨끗이 작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저 다음 단계로 간 것뿐’이라며, ‘작별한 건 맞지만 깨끗이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사는데 그건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 pp.129~130
종이 위에 연필이 마찰하는 순간 떨림을 느끼며 소리는 새삼 ‘그래, 나는 이 느낌을 좋아했지’ 생각했다. ‘누군가와 악수하지 않고도 접촉하는 듯한 감각을.’ --- p.147
채운이 생각하기에 논리로 설명 가능한 일은 대부분 ‘그래서’와 ‘그런 뒤’ 다음에 일어났다. 반면 흥미를 끄는 쪽은 ‘그런데’나 ‘한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접속사 없이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 p.159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 p.182
먼 데서 온 그 빛은 사방의 묘석뿐 아니라 소리의 머리통도 따뜻이 데웠다. 아직 자라는 중인, 여전히 자랄 것이 남은 한 여자아이의 정수리를. 그 빛은 마치 옛 화가들이 누군가의 눈동자에 빛을 새겨넣을 때 붓 끝에 묻힌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 같았다. 소량이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 --- pp.195~196
지우는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임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 --- pp.202~203
여러 눈송이가 차창에 붙어 섬세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드러내고는 이내 녹아 없어졌다. 그걸 보자 지우는 사방에서 내리는 눈송이가 왠지 엄마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어떤 거짓은 용서해주고 어떤 진실은 조용히 승인해주는 작은 기척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