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아침입니다. 모닝샴푸로 머리를 감고 외출합니다’ 같은 내용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려도 좋을 것 같다는 제안도 했지만 ‘그렇게 한가한 년 있으면 그년에게 부탁하라’는 소리가 돌아왔다. 컴퓨터도 그렇고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무지하고 무심한 여자는 찾아보기 힘든 법인데 식당에 한 2년 나가더니 아내가 그런 여자가 되었다. 휴대폰으로 뭔가 검색은 하는 것 같은데 주로 19금 로맨스판타지 소설이나 아이들 학습 관련이 아닐까 싶었다. 라면이 쫄면이 되도록 고스톱을 치다 그의 지적을 받은 적도 있었다.
‘뭘 그리 이상한 눈으로 봐? 주연이 엄마는 휴대폰으로 주식도 사고파는데 100원짜리 고스톱도 못 쳐?’ 이렇게 대들어, 말없이 서 있어야 했다. 무종은 가끔 샴푸영업이라는 광대한 세계와 독대하며 고독을 느끼곤 했다. 오늘 밤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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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벌어야 나도 투자를 할 터인데." 중얼거렸다.
"회사 명의로 하나 트시죠. 내규에 자산운영 규정이 있지 않나요?"
그런 규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주식, 선물, 옵션, 그리고 가상화폐까지 매우 폭넓게 자산을 운영하고 계신다는 말은 성 차장으로부터 들었다. 절대로 예금이나 공사채나 펀드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는 말도. 즉 안정적 저수익을 매우 싫어하신다는 것이었다. 무종이 개별주식을 권유할 수는 있지만 결과가 잘못되면 죽음이 예상된다는 건 거짓이 아닐 것이었다.
“그것보다 코스닥에 상장을 하면 좋긴 한데.”
샴푸를 곁눈질한 조가 떨떠름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무종은 “상장이 어려우면 코스닥 업체와 엠오유를 체결할 수도 있고” 말하고는 그만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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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앞에서야 백 번을 쫓겨난들 어떠랴. 백 명의 실물은 보겠지. 백 개의 머리통과 백 개의 낯짝을 보겠지. 그녀들은 오직 한 사람 무종의 영리한 얼굴만을 보게 되리라. 먼지떨이도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바로 쫓겨난 무종은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복도 끝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후 미용실 문을 빼꼼 열고 회오리머리 디자이너를 손짓으로 불러냈다. 여러번 손짓을 하자 회오리머리가 심하게 인상을 쓰며 밖으로 나왔다.
“이런 제안은 사실 함부로 드리지 않는데 총매출의 15퍼센트를 보장하겠소. 대신 유명세가 있어야 합니다. 아까 그 탤런트 정도로는 안 되고 송혜교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런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미치겠네.”
“네?”
“미치셨나고?”
“... 좀 더 들어보시오. 매출 증가분을 어떻게 파악하느냐가 문제인데 송혜교 효과를 측정하는 방식이 있어요. 거의 정확하다고 보면 됩니다.”
“한 번만 더 나타나서 헛소리 지껄이면... 에이 가요. 가.”
그러면서 회오리머리가 가위 든 손을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가위를 들어 올려? 무종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실명을 하는지 심장을 꿰뚫리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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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요?"
무종은 말없이 그녀를 본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상심한 듯한 모습, 그리고 먼 기억을 불러오는 목소리.
“여기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날.”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그건 YMCA 앞이었다. 남자와 헤어지고 혼자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밟았고 그녀가 버스정류장 앞에 서 있을 때 그가 그녀를 발견한다. 그녀는 깜짝 놀란다. 그때 그녀의 얼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둡고 슬픔에 차올라 있던 얼굴, 그 얼굴을 그는 사랑했었다.
“그날 경복궁 쪽으로 걸었고, 차를 마셨고 다시 걸어 무교동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밤에 가는 비가 내렸고 걸어서 삼청공원으로 갔죠..... . 왜 그런 게 다 기억나죠?”
글쎄 왜일까? 무종도 기억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까닭에서이지 않을까.
"나중에는 비가 엄청 왔죠. 우산도 없었고, 사과박스 같은 거 같이 쓰고 공원에서 내려온 거, 기억나요? 덕분에 머리가 맞닿았고 ... 그때 빗물에 젖은 무종 씨 머리 냄새 나쁘지 않았는데... 뭐라 할까, 좀 슬픈 느낌?"
얘기를 하면서도 쑥스러운지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의 감상적인 목소리가 무척 낯설었지만 그녀가 아닌 연극배우의 목소리를 듣는 듯했지만, 머리에서 무슨 슬픈 냄새가 났다고 우겨대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종은 신중한 태도로 듣고 있었다. 모든 게 기억났고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를 아직도 듣고 있는 듯하다. 굳이 말하자면 무교동이 아니라 안국동이었고, 비는 그쳤다 내렸다 했고, 머리가 아니라 어깨와 팔이 닿았고, 마지막엔 무교동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가 떠났다. 밤 10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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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은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로 포문을 연 후 “요 몇 년 아파트값이 많이 오른 것 같은데, 여기 오면서 보니까 이 지역도 대단위아파트가 상당히 많고 자산가치가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즐거우시죠?”하고 분위기를 띄웠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잘못 짚은 것 같았다. 해서 “에... 주식도 블루칩이 충분히 오르고 나면 그다음으로 옐로우칩이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파트도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런데 곧바로,
“이 동네는 옐로우칩이 아니라 저가잡주거든요.” 하고 어디서 뾰족한 소리가 나왔다.
“아... 잡주... 하하 그렇게 비하하시면 안 되고, 제가 보니 저평가 가치주로 보입니다. 인내하시고 때가 되면 눈 밝은 사람들이 매수신호를 보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저 전월세 살거든요. 그러니 오르든 말든 일 없어요.”
얼굴이 기중 아름다운 여인이 거의 뻔뻔한 태도로 쏘아붙였다. 전월세 산다고? 내심 반가움이 솟구쳤으나 무종은 숙연한 얼굴을 잠시 했다가 빙그레 웃고는, “요즘은 무주택자가 아파트 청약기회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녀가 많은 가정은 특히 기회가 더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말했다.
“아저씨. 샴푸 얘기하러 오신 것 아닌가요?”
실내에서 목도리도 풀지 않은 아주머니가 새된 소리를 하였다.
--- p.293
화장실에 들어가자 모닝샴푸가 욕조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세면대에는 요즘 한창 까불어대는 LG 프리미엄 샴푸가 린스와 세트로 있었는데 누나와 아이들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모닝샴푸는 어머니 혼자만 쓰는 거였다. 하긴 어머니도 무종이 중학교 다닐 무렵엔 럭키인지 차밍인지 하는 샴푸를 애용했고, 머리를 막 감고 나왔을 때나 무종의 옷매무새를 고쳐줄 때나 무종이 학원을 빼먹고 담배 피우며 돌아다니다 들켜 ‘어이구 이놈아!’ 등짝을 내리칠 때에 풍겼던,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것 같은 그 향기로운 냄새가 불현듯 살아났다. 그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냄새였다. 지금은 가늘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샴푸 성분마저 흡수하지 못하는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이.... 무종은 오열하는 대신 변기 뚜껑을 올리고 오줌물을 오래오래 흘렸다.
--- p.361
이제 더는 어디로 떨어진다 말인가.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남자를 보라! 사랑도 연애도 심지어 이별조차 멋지지 않은가. 너와 헤어졌다가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인 누구와 헤어졌다는 게 중요한 여자들이 있다. 현아 씨와의 결말이 어떻게 나든 무종은 존재감이 있는 남자로 그녀에게 각인되고 싶었다. 욕을 얻어먹더라도 그러한 존재로 욕을 얻어먹고 싶은 것이다. 가령 세계를 상대로 돌아다니는 슈퍼 세일즈맨의 존재로, 아니라면 KTX를 타고 국내 출장이 잦은 직급 있는 세일즈맨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든 그녀에게 괜찮은 식사를 제공하고 뮤지컬이나 오페라 공연 티켓을 예약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아 그것도 아니면 그 인간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구나 하고 증오심을 품게 하기라도. 그래, 밋밋한 거보단 증오가 낫지.
--- p.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