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어떻게 오던가.
실없이 부는 훈풍에 실려 오던가. 아롱아롱 아지랑이 숨결에 묻혀 오던가. 밤새 속살거리는 실비를 타고 오던가. 새벽부터 짖어대는 딱새들의 울음소리로 오던가. 얼음 풀린 갯가의 차오르는 밀물로 오던가.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열차의 기적소리로 오던가. 막 도착한 그 열차는 실어온 동백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나는데……
봄이 어떻게 오던가.
먼 산 방울방울 눈 녹는 소리로 오던가. 바싹 깊은 계곡 얼음장 깨지는 소리로 오던가. 묵은 옷들을 빨래하는 아낙네의 방망이질 소리로 오던가. 살픗 내리는 가랑비에 와르르 무너지는 산사태로 오던가. 가슴에 하이얀 손수건을 단정히 찬 신입 초등학생들의 그 경쾌한 등굣길로 오던가. 거리의 좌판대에 진열된 봄나물의 향기로 오던가.
봄이 어떻게 오던가.
밤새 앓던 몸살이 그친 이 아침, 온몸에 피어오르던 열꽃들로 오던가. 첫 고백을 들은 처녀의 속살거리는 귓속말로 오던가. 그네의 맑은 눈동자에 어리는 별빛처럼, 노을처럼 오던가. 첫 아이를 가진 어머니의 부풀어 오르는 젖살처럼 오던가. 먼바다를 건너 온 사내들의 푸른 힘줄에서 불끈 솟구치는 혈류로 오던가.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이다. 이름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름이 없으므로 있는 것이 아닌 것에, 이름을 불러 주어 이제 그를 그 아무것이, 그 무엇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꽃이라 불러 주고, 나비라고 불러 준다는 것이다. 처녀라 불러 주고 사내라고 불러 준다는 것이다. 처녀라 불러 주어 처녀가 되는 처녀와 사내라 불러 주어 사내가 되는 그 사내. 봄이 온다는 것은 그 무엇이 된다는 것이다. 새록새록 눈 녹는 소리에 여기저기 언 땅을 밀치고 솟아오르는 새순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가 흔들어 깨워준다는 것이다. 잠들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잠들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누군가가 깨워서 이제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살아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아침에 늦잠 든 아이를 어머니가 흔들어 깨우듯 잠든 돌멩이는 흐르는 물이 깨우고, 잠든 나무는 따뜻한 봄볕이 깨우고, 잠든 절벽은 산사태가 나서 깨운다. 흔들어 깨워서 마음이 되는 나의 마음,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가 흔들어 깨워 의미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바람에 하나씩 눈 뜨는 나무의 잎새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무심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심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그리움은 누군가를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흐르는 물속의 돌멩이는 먼 하늘의 흰 구름을 그리워하고, 갓 피어난 여린 새싹들은 태양을 그리워하고, 무너진 절벽은 감싸 안을 수풀을 그리워한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를 ‘당신’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아른아른 취해 아지랑이 먼 하늘을 황홀하게 우러르는 꽃들의 눈빛.
봄이 온다는 것은
아득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움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그리움만으로는 그 무엇도 아닌 의미를 이제 내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아니 당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곧 당신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되는 나. 봄이 온다는 것은 아득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가지에 물오르듯 아아, 초록으로 번지는 이 슬픔.
---「서시 - 누군가에게」중에서
「1부」
눈 내리는 아침은 아름다워라.
창밖은
눈이 부신 순은純銀의 정원,
하늘나라 만개한 벚꽃잎들이
일시에 흩날려 쌓임이던가.
길 잃은 별들이 실수로 내려
온 천지 환하게 밝힘이던가.
아득한 전설 속의 공주님처럼
그대
홀연 은하에서 찾아 왔거니,
앳되고도 순결한 그 하얀
웨딩드레스는
신이 당신의 화실에서 펼쳐 드신, 빈
화폭 같구나.
눈 내리는 아침은 신비롭나니
나 이제 이 지상에서
가장 경건하고도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그대의 가슴에 담고 싶어라.
하이얗게 눈 덮인 이
아침엔………
---「눈 내리는 아침엔」중에서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茶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청자 다기茶器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한 모금,
마른 입술을 적시는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그리움에 지치거든」중에서
나무가
꽃눈을 틔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 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 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당신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편지」중에서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려 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말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안녕”,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
어리는 꽃잎,
한때 격정으로 휘몰아치던 나의 사랑은
이제 꽃잎으로 지고 있다.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우리의 슬픈 가을은 아직도 멀다.
기다려 달라고 말해 다오.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이별의 말」중에서
바람에 꽃들이 피어나고
바람에 꽃들이 진다.
바람에 구름이 모이고
바람에 구름이 흩어진다.
통영은 그 바람의 항구,
꽃과 새와 구름의 기항지.
꽃과 새와 구름의 출항지,
통영에서는
선아,
머리에 석남 꽃 꽂고
수평선 너머 먼
하늘을 날아보자.
운명 같은 것, 사랑 같은 것 꽃잎에 싣고,
이별 같은 것, 만남 같은 것 구름에 싣고.
― 이영 미술관 소장, 전혁림의 「통영 갈매기」를 보고
---「통영에서」중에서
그것을 불러 보석이라 이름한다.
햇빛에
눈부신 그 반짝거림,
강변 모래 언덕에
사금파리 하나 반쯤 묻혀 있다.
보석이란 가장 소중한 마음을 이르는 것이려니
우리 어린 날
네게 바친 이 순수한 영혼의 징표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깨진 것은 모두 보석이 된다.
한때 값진 도자기였을지라도,
한때 투박한 사발이었을지라도
그것은 한낱
장에 갇힌 그릇일 뿐.
깨지는 것은
완전한 자유에 이른 까닭에
보석이 된다.
그 봄날의 풀꽃 반지도,
그 강변의 모래성도
지금은 모두 강물에 씻겨갔지만
우리들의 강 언덕엔 눈부신 보석 하나
푸른 하늘을 지키고 있다.
영원처럼……
---「보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