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효용의 단계를 넘어서면 결국 우리가 성공하고자 하는 이유는 존재감 때문이다. 그것들은 존재감을 높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자유의 느낌을 맛보도록 해준다. 그러니까 결국 돈도 권력도 명성도 존재감에 대한 환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물론 돈이 많을수록, 권력이 커질수록, 명성이 높아질수록 존재감은 커진다. 그와 더불어 자유의 느낌도 증가한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질적인 자유의 양은 어느 정도까지만 증가한다.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돈과 권력과 명예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기 시작한다. 그게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어쩌면 지혜인지도 모른다. 최대의 자유란 어쩌면 부족과 넘침 사이의 어느 한 지점, 궁핍과 탐욕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단에 달린 문제인지도 모른다.
--- p.60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부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의 소설에서 자유의 환영을 극한까지 좇아가는 인물들을 창조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자유로운 인물처럼, 자유를 획득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쇠사슬을 찬 노예나 마찬가지로 부자유스럽다는 점에서 ‘자유인의 환영’, 즉 가짜 자유인이라 불릴 수 있다. 그들은 오로지 본능의 만족, 즉 ‘자유욕’의 실현만 추구한다는 것, 그 자유욕의 실현 과정에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드러낸다는 것, 인간성과 도덕을 무시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결과적으로 부자유의 화신이 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 p.76
조르바의 두려움은 보편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합당한 것은 아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늙어간다는 것이 무척 두렵고 혐오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걸 반드시 두려워하고 혐오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시간을 하나의 ‘순리’로 이해하면 늙어간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을, 새로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성숙과 성장과 내면의 자유를 의미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도, 숨길 일도, 막아야 할 일도 아니다. ‘안티에이징’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잘못된 단어의 조합이다.
--- p.105
두려움은 인간다움의 한 측면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는 한 그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서도 안 된다.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완전히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이 몹시 두려울 것 같다.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란 일종의 수련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용기를 얻는다. 이때의 용기는 무감각과는 다른 자질이다. 용기는 우리를 강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너그럽게 하지만 우리를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해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오를로프라는 인간 유형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오를로프에게서 그가 발견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감각이었으며, 자유가 아니라 굴종이었다.
--- p.95
정의는 『죄와 벌』에서 일어나는 살인의 주요 동기처럼 보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천재는 정의의 관념 자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정의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리주의, 혹은 공리주의와 유사한 산술적 이론들은 정의를 구현하는 데 역부족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대체로 모든 것을 숫자 혹은 산술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산술적인 해석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공리주의의 산술에 저항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산수는 무정하고 무감각한 돌벽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 살인은 벤담과 벤담의 후예들, 그리고 트롤리 딜레마의 테두리 안에서 답을 찾으려는 다양한 영역의 이론가들을 향해 작가가 던지는 냉소다.
--- p.147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혼자와 다수의 대립은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양자의 관계는 대단히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면서 무수한 뉘앙스와 음영을 만들어낸다. 이 어려운 관계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에게 혼자와 다수는 그 상태 자체만으로는 대립이 아닌 상호 복제의 관계에 놓인다. 혼자도 혼자 나름이고 함께도 함께 나름이라는 이야기다. 단절과 고독은 다른 것이다. 홀로 있다고 해서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인 공동생활이 반드시 공감과 소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고립은 동일한 공간에 함께 있을 때도 가능하고, 고독은 혼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소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동일한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 그 자체만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그것은 온갖 단절된 단위들의 기계적인 공존에 불과할 뿐이다.
--- p.197
혐오스러운 사람을 혐오하는 것은 얼핏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증오스러운 인간을 증오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혐오는 곧 세상 혐오로 이어지고, 세상 혐오는 곧 세상을 만든 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여러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고, 여러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세상을 증오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증오는 곧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를 부정하는 것이고, 조물주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증오심을 품은 채 살아가기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족쇄를 차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유도, 그리고 증오가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이 증오의 족쇄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도 없고 사회의 유대도 없다.
--- p.206
라스콜리니코프가 모르는 것이 또 있다. 사람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버러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결코 버러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모른다. 소냐는 비천한 존재일망정 스스로를 버러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비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겸손하지만 자학하지는 않는다. 아니 겸손하기 때문에 자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버러지가 아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오만하기 때문에 자학한다. 극도의 오만과 극도의 자기 비하는 한가지다. 그는 비천한 존재들은 모두 버러지로 취급하기에 스스로가 비천하다고 느껴질 때 스스로를 버러지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버러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버러지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노파를 죽이듯이 자신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 p.286
삶을 산다는 것은 곧 견뎌낸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삶을 살려면 인간은 견뎌낸다는 것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견뎌낸다는 것은 그냥 참는 것이 아니다. 그냥 묵인하는 것도 아니고 용인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단순히 불행이나 어려움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때가 되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고, 마침내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경주나 투쟁이 아니라 공존으로 이해할 때 가능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순리에 대한, 그리고 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속에서 가능해지는,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의미한다. 견뎌냄을 이해한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많다”.
---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