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섬을 ‘삼다의 섬’, ‘삼무의 섬’이라고 부르는데, 한반도 여타 지역과 변별되는 특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둘은 모두 유효하지만, 삼다와 삼무는 놓인 층위가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특징은 제주 섬의 열악한 자연 환경을 나타낸다. 돌 · 바람이 많은 사실이야 뻔히 확인되는 조건이니 새삼 첨언할 필요가 없고, 남자에 비하여 여자가 많았던 상황 또한 섬의 토질 및 섬을 둘러싼 사나운 바다라는 자연 조건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어찌하여 제주 섬의 남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가.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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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조를 만들어 내고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은 지리적 조건 위에서 형성된다. 제주 섬의 독특한 공동체문화는 제주 섬의 지정학적 위치와 척박한 토질을 배경으로 출현하였다. 여기서 한반도 중앙권력은 제주 사람들을 뇌옥牢獄과도 같은 섬 속에 고립시키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공동체문화가 형성되는 역사적인 조건을 부여하였다. 제주 사람들의 생활 방식 및 의식 구조 변화를 강제한 중앙권력의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목호의 난 진압, 목마 경제 통제, 출륙금지령 발동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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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눌음, 궨당, 분짓정신, 조냥정신과 같은 문화는 제주 섬에 갇힌 사람들이 생존 방안을 모색하면서 일구어낸 삶의 방식이었다. 척박한 자연환경 및 과도한 진상 · 관행화된 탐관의 횡포를 견디어내어 적응하면서 출륙금지령 시기 제주 섬에서 공동체문화가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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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하였어도 제주 섬에 대한 편견은 변함이 없었다. “제주도는 (중략) 몇 세기 동안 분리된 한 지방이었으며, 제주도의 거주자들은 좋은 평판을 들을 수 없었다.” 제주 섬을 둘러싼 이러한 지역감정은 제주 사람들과 제주공동체문화를 멸시하고 적대시하는 데 적지 않은 동력을 부여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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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륙금지령이 선포되자 제주 섬에 고립된 사람들은 섬 안에서 어떻게든 식량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척박한 토질로 인하여 곡물 생산력이 낮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주인들은 직접 농사를 짓는 도리밖에 없었다. 한정된 지역, 연속되는 시간의 틀에 근거한 생활은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해상교역 시대에도 접하지 못했던 생존 조건이었다. 제주의 마을공동체는 그와 같은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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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기억이 담고 있는 서사로써 역사와 맞서는 장르가 소설이고, 기억이 역사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을 토해내는 장르가 서정시 아닌가.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본디 고정된 틀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와 대상을 총체적이고 생동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현재성’을 증명”하는 데 자리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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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반공몰이에 입각한 역사관을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였다면, 장편소설은 그 반대편에서 사실 복원 및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역사관을 제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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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제목 ‘제주도우다’는 소설에서 두 번 제시된다. 첫 번째는 일본에서 노동자로 전전했던 제주인들이 해방을 맞아 귀향하는 장면에서다.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출국 심사하는 맥아더 사령부 미군이” 묻는다. “북조선으로 가겠느냐, 남조선으로 가겠느냐.” 그런데 귀향민들은 “전쟁 중에 정신없이” 살았던 터라 “삼팔선이 그어진” 줄도 몰랐다. “그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해십주.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로 가겠다!’ 하고.” 이에 “마중 나왔던 사람들이 감격해서 환성을 질렀다. ‘맞아, 맞아, 우린 북조선도 아니고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란 말이여!’”(1, 296) 여기서 ’북조선’, ‘남조선’은 각각 사회주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삼팔선이 그어진 사실도 모른 채 생업에만 몰두했던 그들이 특정한 이념으로 무장하였을 리 없다. 그들은 그저 고향을 그리워하며 떨어져 살아왔던 ‘제주도’ 공동체의 일원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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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는 제목 자체가 이미 공동체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현기영의 ‘스완송’ 『제주도우다』는 자신이 공동체주의자 고순흠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 p.273
크로포트킨의 체험 · 제주 역사에서 드러났듯이, 자연 상태의 인간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 머무른다는 가설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조에 vs 비오스’라는 이분법을 넘어 ‘생명’의 지평 위에서 권력 문제를 재구성해야 하는 까닭은 이 대목에서 명확해진다. 자연 · 자치 · 자유를 원리로 삼은 공동체주의에 관한 논의도 그 과정에서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 p.310
자크 데리다는 현재 출몰하고 있는 유령을 미래에서 도래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유령은 해원이 완료되는 시점에 이르러 스스로 소멸하는 법이니, 원한이 남아있는 한 유령은 해원을 위하여 현재 세계로 끊임없이 건너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살아있는 우리는 유령/망자가 출몰하는 지점을 따라가며 미래로 향하는 존재일 터이다.
--- p.326
현기영의 초기작에는 서울말 사용에 대한 거부감이 문화충돌과 연동하여 표출되어 있다. 제주어와 서울말 사이에서 상경 제주인들이 겪어야 했던 스트레스는 「해룡 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제주어(“어디 살암서?”)와 서울말(“어디 사니?”)이 뒤섞여 이도저도 아닌 발화(“어디 살암니?”)를 내뱉어 웃음거리로 전락한 인물은 희화화된 경우다.
--- p.344
제주 지식인들이 글의 세계로 진입하며 겪게 되는 존재의 균열은 육지와의 심각한 문화적 · 언어적 상이함에서 기인한다. 제주의 문화가 상이함을 유지하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섬이 끌어안아야 할 지리적 고립이겠으나, 제주도를 고립 · 배척하였던 중앙권력의 정책 또한 무시할 수 없다.
--- p.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