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너구리와 동고동락하는 열두 살 소년의 아름다운 성장기

작가의 어린 시절이 녹아 있는 《꼬마 너구리 라스칼》은 1963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후로 미국 전역에서 스테디셀러가 된 것은 물론 1963년에 전미 도서관 협회 청소년 권장 도서로 선정되고 1964년 뉴베리 아너 상을 받은 수작이다. 또한 전 세계 18개 언어로 번역되고 1969년 월트 디즈니사가 영화로 제작하는 등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1977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으로 애니메이션 “미국 너구리 라스칼”이 탄생되기도 했다.
《꼬마 너구리 라스칼》에는 외로운 열두 살 소년이 야생 새끼너구리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 년간의 에피소드들이 20세기 초반의 북미 전원을 무대로 펼쳐져 있다. 새끼너구리와 동고동락하는 스털링의 아름다운 성장기가 북미 대자연의 풍광 속에 오롯이 묘사되어 있어, 작품의 웅장미와 서정미, 소소한 사건들이 빚는 잔재미들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1918년이란 역사적 배경과 전근대 문화와 근대 문화가 공존하면서 야기되는 갈등과 혼란, 근대로 발돋음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놓인 북미의 전원 문화를 작품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방이 열 개나 되는 이 커다란 집에 열두 살짜리 아이만 달랑 거실에 앉아 기나긴 생각에 잠기거나 정신 없이 카누를 만들 때가 많았던(26쪽)” 스털링은 다소 외롭게 자란 아이다. 종종 아버지가 출장을 가면 사나흘 동안은 혼자 집을 지켜야 했던 스털링에게 가족은 개 와우저, 까마귀 포, 그리고 몇몇 고양이 등 동물 가족뿐이다. 그런 스털링에게 침대에서 잠도 같이 자고 식탁에서 식사도 같이 하고 어디를 가든 동행하는 라스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친숙하고 소중한, 외로움을 달래주는 가족이자 친구가 된다.
500그램조차 안 되는 생명체를 돌보아야 한다는 느낌을 받은 후부터 스털링은 보호자가 되는 뿌듯함과 책임감을 느끼고, 결국 그 어린 새끼너구리가 6킬로그램 정도의 장성한 너구리가 될 때까지 사랑과 정성을 아끼지 않는 과정 속에서 스털링의 영혼과 마음과 몸 역시 부쩍 성장한다. 작은 생명체를 돌보는 일 년여 시간 동안, 스털링은 라스칼처럼 작은 동물조차도 호기심 많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아파한다는 사실, 엄마 같은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 한때는 한집에서 즐겁게 살던 가족도 자식이 장성하면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자기 인생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갈 권리가 있다는 사실 등 열두 살이라는 사춘기 시절에 삶과 죽음, 만남과 작별, 행복과 불행 등 삶의 갖가지 형태들을 경험하고 느끼고 발견해 나간다. 동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섬세한 눈길을 가진 스털링은 열세 살이 되어 느끼는 봄기운 속에서 마침내 자신 역시 “솜털 보송보송한 버들가지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의 탄식과 밤이면 들려오는 어수선한 울음소리에 내 마음도 지금 막 세상 이치에 눈뜨기 시작한 다른 어린 짐승들만큼이나 싱숭생숭했다.(226쪽)”고 토로한다. 나무에 새순이 돋고 동물들이 짝짓기를 시작하는 자연의 섭리처럼 자연의 일부인 자신 역시 한층 성숙해져 감을 발견한 것이다.


어린 소년이 깨우친 삶의 진정성과 자연 회복의 중요성

《꼬마 너구리 라스칼》의 시간적인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될 무렵인 1918년으로, 북미 곳곳에 인디언들의 발자취와 마차 바퀴 자국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고, 쏙독새의 울음소리로 밤의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는, 태곳적 자연의 숨결이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던 시절이다. 마차와 자동차가 공존하고 자동차 산업으로 마구 제작업이 사양으로 접어들던 산업 과도기 시절, 외로움과 쓸쓸함을 메우기 위해 갖가지 동물들을 키우던 스털링은 사향뒤쥐를 사냥해서 푼돈을 벌기도 하고 야생 동물을 집에서 키우기도 하는데, 어느 날 라스칼을 생포하고 직접 기르게 된다. 그리고 라스칼이나 스컹크, 까마귀 포가 일으키는 소소한 사건들로 마을 어른들의 언성을 산다. 하지만 라스칼과 동거동락하는 일 년여 시간 속에서 스털링은 엄마가 가르쳐 준, 식물들은 씨앗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생명의 신비를 너구리의 습성을 그대로 간직한 라스칼에게서 발견하고는 경이로워한다. 그리고 라이플총 개머리 재목으로 잘려 나가는 나무들과 사냥 덫에 앞발이 걸려 생포된 너구리 사진들, 그리고 집안에 절대로 동물들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엄포를 놓거나 철장에 가두어 두라는 세상의 냉엄한 시선을 경험하면서, 스털링은 점차 라스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라스칼을 본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 자연성을 회복시켜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송어 새끼나 목도리도요 새끼, 또 내 꼬마 너구리같이 어린 것들이 지구 나이만큼이나 오래 된 표석 사이를 헤치며 수로를 따라 이동하는 게 기적 같았다. 이 계절에 태어난 어린 생명들이 오래 된 화강암 사이를 거닐고 있다는 사실이.(108쪽)” 놀라울 따름인 스털링은 “항상 부지런히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이 섬세한 라스칼의 손을 어떻게 못쓰게 망가뜨릴 수 있냐.(198쪽)”고 미안해하면서 프랑스에서 1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는 날 스스로 네발짐승과 조류와 영구 평화 협정을 맺고 다시는 동물 사냥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결국 라스칼이 암컷 너구리와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힘든 결정을 내린다.
“딱딱한 예배석에 앉아 후튼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보다 정원에 앉아 콩을 딸 때 우주 질서에 대해 더 많이 배웠다고 생각(83쪽)”하는 스털링에게 자연은 삶의 교과서였고, “철장 만드는 일은 이미 약속한 일이고, 약속은 명예를 걸고 지켜야(128쪽)” 하는 세상은 주어진 삶의 과제였다. 《꼬마 너구리 라스칼》에는 이렇듯 너구리 한 마리를 통해 세상에 대해선 성숙하게 반응하고 자연에 대해선 순수하게 이해하는 어린 소년의 섬세한 시선과 성숙해지는 마음이 따뜻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꼬마 너구리 라스칼》에는 삶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세상을 맞서고자 하는 열두 살 소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정원에서 직접 식물을 가꾸며 흙 속에 감춰진 우주의 신비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인생의 꿈을 꾸고, 카누를 직접 제작하며 내릴톱 끝에 묻는 대팻밥을 치우고,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물들을 보며 스털링은 누군가에게 존속되어 명령을 받고 명령을 하는 어린 시절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어린 시절을 즐긴다. 그리고 다소 무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스털링이 원하는 대로 인정해 주고 배려해 주는 아버지처럼, 스털링 역시 라스칼에게 라스칼의 삶을 선택할 권리를 준다. 라스칼에게 목걸이를 채우거나 암컷 너구리와 떠나는 순간에도 라스칼의 생각을 묻는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라스칼. 이건 네 인생이야.(235쪽)”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