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앞에 나타날 때는 카이사르의 거처로 운반된 깔개 속에서 21세의 생기발랄함 모습을 불쑥 나타냈다. 명문 출신인데다 귀족 정신의 화신 같은 카이사르한테는 재물로 눈이 멀게 하는 방법보다는 재치있고 유쾌한 방법이 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름이 두 개뿐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평민계급 출신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라쿠스나 폼페이우스처럼 원래는 평민이라도 오래 전에 원로원 계급에 들어간 평민 귀족의 유력자였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에게서 볼 수 있는 벼락부자 취미는 출신계급보다는 그 개인의 취향에 따른 것이다. 탄핵 연설문이니까 좀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탐욕스럽고 천박하다.
--- p.459
이탈이아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도 '3.15'를 이렇게 단정하고 있다. '회고주의자들의 자기도취가 초래한 무익하고 유해한 비극' '3.15는 카이사르의 비극이기보다 오히려 브루투스의 비극이 아니었을까. 시대에 거부당한 고결한 정신의 비극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눈감은 고결한 정신의 비극.
--- p.451
연단에 모습을 나타낸 카이사르는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말했다.
'무엇을 바라는가?'
병사들은 저마다 제대시켜 달라고 외쳤다. 다음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 전선이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북아프리카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제대를 요구하면, 카이사르도 일시불이나 급료인상을 약속하여 타협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들에게는 카이사르가 전쟁을 계속하는 한 제대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카이사르한테서 돌아온 대답은 천만 뜻밖이었다.
'제대를 허락한다.'
--- p.234
북이탈리아의 도시 피아첸차에서 파업에 돌입한 제9군단 병사들은 즉각 제대를 요구했다. 서부전선을 제압하고 드디어 폼페이우스와 맞설 수 있게 된 지금, 카이사르가 단 한 명의 병사도 제대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고 잘 알고 있었다. 즉각 제대를 요구조건으로 내걸기는 했지만, 사실은 급료인상이 진짜 목적이었다. 피아첸차에 도착하여 병사들 앞에 나타난 카이사르는 여느 때처럼 단도직입적을 입을 열었다.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 나는 여러분에게 사랑받는 사령관이기를 원하다. 나만큼 여러분의 안전을 걱정하는 삶도 없을 것이며, 또 여러분이 경제적을 풍족해지고 전사로서의 명예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삶도 ㅇ벗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사들이 무엇이든 제먹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는 뜻은 아니다(후략)'
--- p.79-80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도 로마에 와서 내가 목표로 삼고 있는 사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협력해준다면 얼마나 기쁘겠소.
--- p.358
공화정 시대의 로마사를 쓴 독일 역사가 몸젠은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 천재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회고주의자들이 아직 대세를 이루고 있던 시대에 오직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창조적 천재는 아니였지만, 카이사르가 갖고 있지 않았던 두 가지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첫째, 회고주의자들이 기원전 49년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모두 죽어버렸다는 점이다.
--- p.516
2천년뒤 영국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마랬다. '폼페이우스는 전쟁터에서는 카이사르가 상대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디라키움에서 패배한 카이사르는 맨 나중에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던 반면, 파르살로스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맨 먼저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다. 그리고 단순히 재능 있는 사람과 천재를 구별해 주는 것은 지성과 정열의 함일인데, 폼페이우스에게는 그것이 모자랐다.---------------------P.194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현실 밖에 보지 않는다---------------------P.202 54세를 맞이한 카이사르는 우선 그가 수립하고자 하는 새 질서의 표어로 '클레멘티아'(관용)을 내걸었다.
---p.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