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꼭 뼈 속에서 사는 것 같아.”
팔꿈치와 무릎이 또다시 욱신거렸다. 우리의 팔다리 속에서 자라나는 뼈. 마치 그 뼈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하얀 세상은 조금씩 넓어져 완성에 가까워진다.
--- p.40
‘이런 마을, 정말 싫어.’
속으로 중얼거리자 나라는 존재가 다시 선명해진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기대하는 미래를 남몰래 경멸한다는 건, 왠지 무척 특별한 여자애가 된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 p.30
먹물 냄새에 취한 듯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우리는 마치 갓 생긴 5초메에 몰래 들어갔을 때처럼 숨죽인 채 완성되지 않은 서로의 몸에 살며시 발을 들여놨다.
--- p.73
어쩌면 만질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상대의 체온을 알아버리면, 연애 감정은 질척한 무언가로 변화한다. 미숙한 몸속을 휘젓고 다니는 열기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런 생각을 했다.
--- p.163
안전한 곳에서 누군가를 관찰한다는 건, 나에게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내가 누구보다 현명하고 올바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내 얼굴에 얼마나 낮은 점수가 매겨졌는지, 이 순간만큼은 잊을 수 있었다. 그러면 늘 갑갑하고 괴로운 이 상태에서 벗어나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 p.178
나에게 이 마을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가슴속에 똬리를 튼 감정이 괴물이 되어 부화할 것만 같았다.
--- p.208
나는 학년 내에 도는 작은 소문들을 놓치지 않고 전부 담아놓고 있었다. 그렇게 다른 여자애들의 보물일 에피소드조차 나의 종교가 되어간다.
오직 이부키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운동장에서 태평하게 축구를 하며 웃고 있다. 사랑을 하며 점점 부자연스러워지는 우리를 비웃듯, 자연스러운 그 모습 그대로.
소녀는 망상과 현실을 하나로 뒤섞어, 가슴에 뿌리내린 발정을 처리하지 못한 채 몸속에서 첫사랑이라는 괴물을 키우고 있었다.
--- p.224
“할머니가 그랬어. 사람은 세계라고.”
“세계?”
“‘그 사람이 있다’고 느껴지는 공간이라고. 난 ‘다니자와가 있다’는 게 느껴지는 공간이 좋아. 넌 별로 자기 얘기를 안 하지만, 왠지 자기 세계가 있는 느낌이야. 그게 나한테는 굉장하게 느껴지고.”
--- p.256
‘무(無)’란 이런 것일까. 하얀 벽을 보며 생각했다. 감옥 안은 이런 광경일지도 모른다. 창문도 없는 거대한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공사 소음이 완전히 멎어버린 고요한 공터에는 풀잎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 p.275
검은 세상이 아니라, 새하얀 세상에서 이부키를 만진다. 어차피 너덜너덜 난도질당할 거라면, 가짜가 아니라 진짜 감정으로, 적어도 솔직한 내 모습 그대로 피투성이가 되고 싶었다. 그런 자신을 상상하자, 몸서리치게 겁이 났지만 거짓된 모습으로 상처 입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99
내 안에서 찰랑찰랑, 모래처럼 흩날려 쌓인 ‘죽어’라는 말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내 모습들이 교실 안에서 서서히 질식해간다.
--- p.323
말은 색연필 같다. 지금까지는 태양을 칠할 때는 붉은색, 바다를 칠할 때는 푸른색 색연필을,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따라 꺼냈다. 하지만 태양을 새파랗게, 바다를 짙은 녹색으로, 좋아하는 색연필을 꺼내 칠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당연한 일들을, 노부코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 p.336
하얀 세상은 빛나는 물로 이루어져 있고, 손을 대면 파문이 되어 번져간다. 하얀빛의 세상에서 나는 세상과 조금씩 닿으며 내가 만든 파문을 바라보는 행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즐거운 건, 지금까지 한 번도 그 파문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348
우리는 서서히 서로의 체온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이제야 하얀 마을 밖으로 흘러나가는 나를 느꼈다.
--- p.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