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은 우리 머리 위에서 천천히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위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듯했다. 오른발은 밧줄 위에 세로로, 왼발은 가로로 놓여 있었으며, 무릎은 살짝 구부린 채 양손을 허리에 대고 있었다. 고개를 젖히고 있던 우리는 가벼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깨달았고, 동시에 우린 절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 pp.23~24
넬레는 여전히 이 모든 게 꿈만 같다. 여기가 자신이 살던 마을이 아니라는 것도, 여기 주민들이 전혀 모르는 얼굴이라는 것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집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도 그렇다. 고향을 떠나다니,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그녀의 인생에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늘 집에서 자랄 거라고, 특히 빵 굽는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가는 커다란 아궁이 옆에서 주로 지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여자아이들은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 그저 태어난 곳을 숙명으로 알고 뿌리를 내린다. 대대로 그래왔다. 어릴 땐 틈틈이 집안일을 거들고, 조금 더 크면 하녀들의 일을 돕고, 어른이 되면 결혼을 한다. 예쁘게 생겼으면 슈테거네 아들이랑 결혼하고, 덜 예쁘면 대장장이네 아들이랑 결혼하고, 일이 더럽게 풀리면 하이네를링네 아들이랑 결혼한다. 그 뒤엔 아이를 가지고, 또 아이를 가지고, 또 아이를 가진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죽는다. 어쨌든 결혼을 하고도 계속 하녀들과 함께 죽도록 집안일에 매달린다. 교회에 가면 시어머니 뒤에 남편과 함께 앉고, 그러다 마흔이 되어 뼈가 아프고 이가 빠질 때쯤이면 시어머니 자리에 앉는다. 그게 여자의 운명이다.
넬레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틸과 함께 떠났다.
--- pp.181~182
“황제를 욕했다고 날 때리지는 마. 나는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너도 알잖아, 광대의 자유를. 광대가 황제를 머저리라고 부르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누군가 한 사람은 해야 돼. 너야 당연히 해서는 안 되지만.”
--- p.228
연극은 가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모든 것이 허위이자 가식이었다. 연극이 아닌 모든 것이 가짜였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바로 그 자신으로, 진실하고 투명했다.
실제 현실에서는 누구도 독백을 하지 않았다. 다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고, 누구도 남의 속을 읽을 수 없었으며, 모두 자기만의 비밀을 무거운 짐처럼 질질 끌고 다녔다. 혼자 방 안에 서서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큰 소리로 말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연극배우 버비지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눈높이로 올리고 걸걸한 목소리로 독백하는 것을 듣다 보면 다른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일을 숨긴 채 사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얼마나 멋진가! 누구도 짜 맞출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문장들이었다. 연극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진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 pp.253~254
광대가 짓궂게 웃었다. 리즈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물을 참으며, 남들은 감히 꺼내지 못하는 말을 자신에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이 바로 궁정에 광대를 두는 이유였다. 원하지 않아도 광대를 들여야 했다. 광대 없는 궁정은 궁정이 아니다. 리즈와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영토가 없음에도 궁정만큼은 최소한의 꼴을 갖추고 싶었다.
---- p.259
세상이라는 게 그랬다. 몇몇 힘 있는 인간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떨거지였다. 그림자 같은 군대, 그 뒤의 인간 무리들, 그리고 지상에 개미처럼 우글거리는, 가진 게 없다는 공통점만을 가진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고 죽었다. 마치 불안으로 파르르 떠는 작은 점과도 같았다. 이런 점들이 모여 만들어진 군집은 한 개체가 없어져도 없어진 걸 모르는 무수한 새 떼나 다름없었다. 정말 중요한 인물은 몇 되지 않았다.
--- p.264
“자, 이제 너희들의 재주를 보여봐라!”
“피곤해요.” 넬레가 말한다.
“뭐라도 얻어먹으려면 놀아줘야지. 어쩔 수 없어. 그건 뒈질 때까지 너희 운명이야. 이제 너흰 유랑 족속이다. 누구도 너희를 보호하지 않아. 비가 내려도 막아줄 지붕이 없고, 비를 피할 집도 없지. 게다가 친구도 없어. 너희와 똑같은 처지의 유랑 족속 말고는. 그렇다고 그 인간들이 너희를 좋아할까? 천만의 말씀. 그럴 리가 없지. 먹을 게 부족하거든. 대신 너희는 자유로워. 누구에게도 복종할 필요 없어. 하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재빨리 도망쳐야 해. 배가 고프면 사람들 앞에서 한바탕 놀아줘야 하고.”
--- p.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