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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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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의 세계사

: 중화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

이종찬 | 알마 | 2014년 02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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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4년 02월 25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17쪽 | 684g | 153*224*30mm
ISBN13 9791185430102
ISBN10 11854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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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종찬
한국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열대학연구소Institute of Tropical Studies를 아주대학교에 설립했으며,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을 탐구하면서 열대학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 과학사학과 및 옌칭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 니담Needham 동아시아과학사연구소 및 웰컴Wellcome 의학사연구소 등에서 방문학자로 지냈으며, 한국사회사학회장을 맡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열대와 서구: 에덴에서 제국으로》(새물결, 2009),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해나무, 2009), 《의학의 세계사》(몸과마음, 2009),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과 근대》(문학과지성사, 2007)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미국의료의 사회사》(폴 스타 지음,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전면개정 번역판, 2012), 《醫哲學의 개념과 이해》(헨릭 월프 외 지음, 아르케, 전면개정 번역판, 2007)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Hygienic Governance and Military Hygiene in the Making of Imperial Japan, 1868~1919〉와 〈帝國의 콩고 식민지배와 조셉 콘라드의 熱帶性에 대한 인식: 문학의 역사사회학과 생물지리학의 융합적 지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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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사시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하기로 결심하다
료타쿠, 준안, 그리고 나까지 셋은 함께 돌아오면서 이날 우리가 보았던 놀라운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것을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의업醫業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게다가 주군을 모시는 신분이면서 의술의 기본이 되는 인체의 구조도 모르고 지금까지 하루하루 의사 일을 해오고 있었다니 정말 면목이 없다. 어쨌든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략이라도 신체의 진리를 이해하고 의술을 펼친다면 의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료타쿠도 정말 지당한 이야기라고 동감했다. 이때 나는 “《타펠 아나토미아》를 새롭게 번역한다면 신체 내부와 외부 구조를 확실히 알게 되어 오늘날의 치료에 크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통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읽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_58쪽

≪해체신서≫의 번역이 완성되고 난학이 시작되다
나는 실제 해부 장면을 보며 네덜란드 해부서의 진위를 확인했고 동양과 서양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데에 경이로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내용을 확실히 배워 실제 치료에 활용하고 이를 통해 일본 의사들이 더 나은 발견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번역을 완성하려고 노심초사하며 낮에 번역 모임에서 해석했던 것을 저녁에 글로 쓰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표현 방식을 여러 가지로 수정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어느덧 4년이 흘렀다. 그동안 초고를 열한 번이나 고쳐 인쇄소에 넘기자 마침내 《해체신서》의 번역 작업이 완성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에도는 난학이 탄생한 요람이 되었다. ‘해부腑分’라고 부르던 것을 새롭게 ‘해체解?’라고 번역했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난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쓰기 시작하여 마침내 일본 전체에서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지금 유행하고 있는 난학의 시작이다._62∼63쪽

번역에 대한 입장
본래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방법이 정해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네덜란드 서적이 번역된 일이 없고 《해체신서》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상세한 부분까지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몇 번이나 얘기했듯이 의사라는 자가 장기의 구조나 모든 기관의 기능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므로 진실을 알고 치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본심이었다.
내 뜻이 이러했으므로 번역을 서둘러 대략적인 내용이라도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고 싶었으며,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던 의도醫道와 비교해가며 빨리 알 수 있게 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생각해왔다. 따라서 되도록 중국인이 사용했던 오래된 명칭을 써서 번역하고 싶었으나 중국의 명칭과 네덜란드의 명칭은 개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하나로 정할 수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종합해보다 이 모든 일이 나를 새로운 학문의 선구자로 만드는 시도라고 마음먹고 어떻게든 사람들이 알기 쉽게 번역했다.
이런 기본 방침을 세운 뒤 때로는 번역을, 때로는 대역對譯을, 때로는 직역을, 때로는 의역을 했고 여러 번 고쳐가며 매일매일 작업에 몰두했다. 결국 초고를 열한 번이나 고쳐 쓰면서 거의 4년에 걸쳐 간신히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_72∼73쪽

≪해체신서≫의 출판
《해체약도》가 완성되고 난 후 본편인 《해체신서》도 출판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네덜란드 이야기》조차 절판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서양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우리는 네덜란드가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비밀리에 네덜란드 번역서를 출판하면 금지령을 어겼다고 벌을 받을지도 몰랐기에 출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_75쪽



열대의 일본, 중화적 세계를 넘어 유럽으로
01 난학의 역사지리적 상상력: 근대 일본의 이념적 토대
네덜란드의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 식민 본부가 있던 바타비아에서 출항한 무역선이 몬순 바람을 타고 매년 7~8월에 데지마에 입항했으며 11월 말부터 12월 초 사이에 일본의 상품을 가득 싣고 데지마를 떠났다. 이때 기존의 관원館員은 새로 오는 관원으로 교체된다. 무역선이 떠나면 데지마의 상관장과 관원, 그리고 의사들은 에도로 가서 무역선을 통해 들어온 진귀한 물품들을 헌상했다. 에도 참부라고 불렸던 이 절차는 1633년부터 매년 한 번씩 진행되었고 1764년 이후에는 2년에 한 번, 1790년부터는 4년에 한 번씩 진행되어 1850년까지 총 166회 진행되었다. 또한 막부는 데지마에 입항하는 모든 네덜란드 무역선에 대해, 유럽을 비롯한 해외의 돌아가는 정세를 담은 일종의 보고서인 “풍설서風說書”를 제출하도록 했으며 중국에서 들어온 무역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했다. 전자를 “화란和蘭 풍설서”, 후자를 “당선唐船 풍설서”라고 각각 불렀다._112쪽

《난학사시》가 메이지 시대에, 그것도 유키치에 의해 일본 사회에 알려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누구인가. 그는 메이지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인 문명개화文明開化, 부국강병富國强兵, 식산흥업殖産興業에 관한 사상적 토대를 정립한 인물이다. 그는 《난학사시》를 읽으며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지향한다,” 즉 탈아입구脫亞入歐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정당성을 찾아냈다. 《난학사시》는 “중화적 사물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려는 그의 ‘탈아론’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난학사시》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쓰였지만 이 책의 근대적 의미를 만들어갔던 것은 유키치로 대표되는 메이지 시대의 사상가들이었다._116쪽

남태평양에 대한 일본의 영토적 의식은 난학의 지리적 상상력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근대 일본은 유럽과 열대 동남아시아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제국적 욕망을 표출했는데, 일본이 분출했던 욕망의 씨앗은 난학의 개척자들이 남긴 저작물에 거의 모두 배태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요컨대, 난학은 근대 일본의 이념적 토대가 된 것이다._121쪽

02 열대 무역, 유럽과 일본의 문화접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의 해적인 왜구倭寇가 14세기부터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만들어갔던 무역 시장에 포르투갈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제일 먼저 말라카의 무역 시장에 진출하면서 ‘황금의 섬’인 류쿠琉球와 ‘은의 섬’인 일본의 존재를 알았다. 이와 같이 16세기 포르투갈과 일본의 접속은 동남아시아에서 왜구의 무역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만 문화가 촉발시켰던 일본-동아시아-열대 동남아시아-이베리아 반도 사이의 문화접변transculaturation은 이렇게 시작되었다._126쪽

귀국 후 다음 해에 발리냐노는 덴쇼소년사절단과 함께 교토로 가서 히데요시를 만났고 사절단은 히데요시에게 여행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사절단의 귀국이 기리스탄 다이묘들에게 미친 영향은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사절단은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유럽이 개발한 활판 기술로 인쇄를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지식의 폭넓은 확산이 가능해졌다. 또한 사절단은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알려진,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1527~1598)가 제작한 《세계지도Theatrum Orbis Terrarum》(1570)를 선물로 받았다. 이 지도를 펼쳐본 기리스탄 다이묘들은 오르텔리우스 지도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표시되어 있지 않음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_134쪽

VOC가 설립되기 이전인 1590년대에 네덜란드의 여러 무역 회사들은 ‘동인도제도East Indies’?네덜란드는 인도의 동쪽을 이렇게 불렀다?에서 무역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도 동남아시아에서 주인선 무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일본, 중국이 동남아시아에서의 무역 경쟁에 뛰어들었다._137∼138쪽

17세기 중엽부터 1853년 매튜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에 의해 막부가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해외 관계에서 일본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동전의 양면처럼 무역과 선교를 추진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외 정책을 간파한 막부가 종교를 배제하고 무역만으로 접근했던 네덜란드와 적극적으로 통상 교류를 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과 유럽의 만남이 태국, 필리핀,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열대 무역 체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16세기 이후 일본은 유럽의 힘에 눌려 일방적으로 문호를 연 것이 아니라 열대 동남아시아에서의 무역 활동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며 문화접변을 실현해나갔다. 이런 점에서 페리를 통해 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강제로 열었다.”라거나 막부 시대 내내 “쇄국” 정책을 실시했다는 역사적 기술은 네덜란드로 상징되는 유럽-열대 동남아시아-동아시아-데지마로 이루어진 문화접변을 통해 근대적 일본이 형성된 과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조심스럽고도 주의 깊은 관찰력으로 열대 동남아시아 및 유럽과의 문화접변을 깊고도 넓게 실행했다._151∼152쪽

03 중화적 세계와의 대결: 인구 · 지리 · 안보
중화적 세계관에 대한 문제의식은 요시무네와 같은 막부의 위정자들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근세 일본은 처음부터 중화적 질서와의 결별이라는 정치 이념에서 출발했고 에도 시대 내내 이런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특히 18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중화적 세계관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소위 ‘일본주의’의 탄생을 이끌었던 인물로 평가받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이런 흐름을 주도했던 국학자다. 스기타 겐파쿠가 《해체신서》의 집필을 마쳤던 1771년에 노리나가는 《나오비노미타마直毘靈》에서 중화적 질서를 당장이라도 전복시킬 기세로 혹독하게 비판했다._170쪽

난학자들은 일본 사회가 직면한 급격한 인구 증가로 초래된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중화적 세계관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일본의 지리적 공간에 대해 자각했다. 아울러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해양 국가와 식민적 팽창의 절박성을 주장했다. 이렇게 난학은 ‘인구-지리-안보’라는 세 가지 큰 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특히 오쓰키 겐타쿠, 시바 고칸, 하야시 시헤이, 혼다 도시아키, 사토 노부히로 등 지리적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난학자들의 지적 작업에 근거해 근대 일본이 열대 남태평양을 아우르는 상상의 공동체 ‘대동아大東亞’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난학은 근대 일본의 군사적 이념을 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위상을 가진다. 결국 일본에서 난학이 태동하고 발달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일본과 네덜란드의 직접 교류라는 좁은 틀이 아니라 유럽-네덜란드-열대 동남아시아-동아시아 및 러시아-일본을 연결하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global network로 바라볼 때 난학의 세계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_196∼197쪽

04 박물학, 시각의 근대
겐파쿠가 한문을 번역어로 사용했다고 해서 그가 중화적 사물의 질서를 추종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체의 구조가 중국 서적에 기술된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뿐이다.” 사실이 그랬다. 겐파쿠가 마에노 료타쿠, 나카가와 준안과 함께 《해체신서》를 번역하기로 굳게 결심하게 된 것도 고쓰가하라에서 이루어졌던 해부 장면을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겐파쿠는 오다노 나오타케에게 부탁해 인체 삽화가 한문으로 번역된 문장과 균형을 맞추도록 편집한 것이다. 겐파쿠가 《난학사시》에서 요시무네 쇼군이 도도네우스와 욘스톤의 그림을 보고 난학의 학습을 허락했음을 강조한 것도 이런 사정과 맞물려 있다. 결국 겐파쿠에게는 한문으로 된 번역어의 청각적 기능보다는 삽화가 보여주는 시각적 기능이 훨씬 중요했으며, 시각이야말로 중화적 사물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근대적 감각이었던 셈이다._239쪽

05 조선 실학 대 일본 난학
무엇보다도 조선 실학자는 사대부 계급이었던 데 반해 일본 난학자는 사무라이 계급이었다. 다음에 논의할 네 가지 사안과 모두 연관되는 이 차이 때문에 정약용, 박제가, 최한기 등은 중인中人들의 영역인 번역, 회화, 박물학, 의술, 기술을 자신들의 과제로 여기지 않았다. 이에 반해 스기타 겐파쿠나 오쓰키 겐타쿠 같은 나가사키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박물학, 회화, 의학, 기술과학에 깊이 천착할 수 있었다. 이 계급적 차이가 조선 실학과 일본 난학의 갈림길을 결정했다. 중국에 비해 조선 사회는 계급 간의 신분 이동이 훨씬 어려웠고 신분 구조가 매우 견고했다. 이런 계급적 구조를 넘어설 수 없었던 조선 실학자들은 소중화小中華의 틀 안에서 맴돌았기에 사대부의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실학자들 중에서 기술과학의 중요성을 인지했던 홍대용조차 이 계급적 구속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둘째, 조선 실학자들은 한문으로 번역된 유럽의 기술과학 서적들을 수용했으나 일본 난학자들은 더 이상 한문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네덜란드어, 영어, 러시아어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언어를 배우며 유럽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이런 차이는 언어의 근대적 전환과 민족의 주체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대단히 큰 차이를 빚어냈다. 하이데거Martin Heiddeger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를 떠올릴 것도 없이, 한문으로 지식을 사회화한 조선 실학과 일본어로 사회화한 일본 난학이 향후 조선과 일본에서 민족의 주체적 형성에 각각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를 살펴보자._250∼251쪽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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