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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문명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왜소한 인간 존재에 관한 상세한 조서(調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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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J. M. G. 르 클레지오
Jean-Marie-Gustave Le Clezio
김정희(candy@yes24.com)
10월 중순경 방한했던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 르 클레지오. 그의 방한과 시기를 맞추어 『우연』, 『성스러운 세 도시』 등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던 그의 소설들이 출간되고 있는 가운데, 민음사에서는 1989년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던 『조서』를 세계문학전집 54번째 책으로 새롭게 번역해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조서』는 르 클레지오가 1963년에 발표한 처녀작으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함께 현대 프랑스 소설 최고의 문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르 클레지오는 스물 세 살 때 쓴 이 첫번째 작품으로 르노도상을 수상하면서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조사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라는 뜻의 제목이지만,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이 책을 통해서 구할 수 없다. 단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태양의 신 아폴론의 이름을 조합한 듯한 `아담 폴로'라는 이름의 사내가 세계와 엄청난 불화를 겪고 있다는 뭉뚱그려진 이미지만 떠오를 뿐이다. “자신이 탈영을 했는지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뛰쳐나왔는지 잘 모르는” 아담 폴로는 산 언덕에 버려진 집에서 마치 이미 죽어 버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 집 근처에 있는 해변에 갈 때에도 사람을 피해 외진 곳을 찾으며, 어쩌다 한번 시내에 간다 하더라도 개를 뒤쫓거나 생필품을 사러 갈 때가 전부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미셸이라는 한 여자밖에 없으며 그녀가 세계와의 미약한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다. 아담 폴로의 시선으로 접하게 되는 세상, 결과적으로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의 머리와 손을 통해 구현되는 세상은 매우 낯설다. 한 컷 한 컷 단편적으로 끊어지거나 논리적 연결 없이 길게 이어지는 대화, 중간중간 삭제된 행들, 인쇄된 신문 기사의 삽입, 찢어진 광고지, 카메라의 줌-인, 줌-아웃 기법처럼 정상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물의 물질성을 극도로 확대해 드러내거나, 그와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축소되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 이 모두는 “밤이 되면 어두워진다”같은 인과율이 지배하는 견고한 현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방한하여 국내 문학 관계자들과 인터뷰할 때 “프랑스와 문화가 아주 다른 한국에서 제 소설을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리라 짐작했다.”는 그의 말마따나, 소위 팬카메라(stylo-camera) 기법으로 극대화된 사실주의적 서술 방식을 통해 제시되는 그의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기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종종 경험하게 되는 작가와 독자, 작중 인물이 일치하는 한 순간-예를 들면 정신병원에 끌려간 아담 폴로가 갑자기 말을 잃게 되는 극적인 장면이랄지- 그 찰나의 느낌이 주는 강력한 인상은 재독할 가치를 높인다. 이 책 뒤에 있는 작품 해설에는 합리주의적 이성으로 자연, 인간과 세계를 재단하고 위장하는 괴물과도 같은 거대한 체계로서의 서구 문명 사회가 안고 있는 한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 『조서』를 소개하고 있다. 읽고 나면 이러한 주제에 대한 상이 다가오며, 아닌 게 아니라 그 모호한 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는 욕구로 인해 다시 한번 꼼꼼히 읽겠노라는 다짐이 든다. |
무더운 여름의 어느 한때 한 사내가 열어젖힌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키가 무척 크고 등이 구부정한 그 사내의 이름은 아담, 아담 폴로였다. 거지 행색의 그는 방 귀퉁이에서 거의 꼼짝도 않고 몇 시간이고 앉아 사방에서 햇빛의 반점들을 찾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보통은 되도록 몸에 닿지 않도록 늘어뜨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병든 짐승들, 교활해서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선, 위험을, 땅바닥에 바싹 붙어 다가오는 위험을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그 위험과 맞닥뜨리면 바싹 움츠려 자신의 몸을 감추는 짐승들 같았다. 활짝 열린 창문 앞 긴 의자 위에 길게 누운 그는 웃통을 벗고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시선은 대각선 방향으로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몸에 걸친 것이라곤 땀에 절고 색이 바랜 베이지색 바지뿐이었고 그것도 무릎 높이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
--- pp.13-14 '그래, 난 정말이야. 게다가 넌 될 대로 되라는 식이야. 왜냐하면 결국은 다 마찬가지가 되고 마니까. 나는 내가 하는 것을 그대로 믿어. 중요한 것은 항상 글을 쓰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면 자유롭지 못한다고 느끼거든. 자기가 바로 자기 자신인 양 말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사람은 더 잘 뒤섞이는 것이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거야. 제 2, 또는 제 3이나 제4의 인자, 그리고 그 망할 제 1의 인자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 알아들어?' --- p.49 지긋지긋해! 하루 종일 그놈의 정신병리학뿐이군 - 내말은 - 이제 이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소. 다 끝이야. 당신들은 당신들이고 나는 나요. 더 이상 내 입장에 서려고 애쓸 것 없소. 나머지는 다 하찮은 것이니까. 나는 지겨워요, 그리고 - 제발 부탁하건대, 더 이상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시요. 당신들도 알겠지만 - 난, 나는 창피한 말이지만 -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그런 얘긴 꺼내지 마시오…… --- pp.336-337 |
불안한 인간 존재와 인위적인 문명사회에 대한 기나긴 조서(調書)
『조서』는 작가 자신이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 자신이 군대에서 탈영했는지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뛰쳐나왔는지 잘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아담 폴로는 산 중턱의 빈집에서 마치 버려진 한 마리 짐승처럼 살고 있으며,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서 혹은 개를 따라가느라 시내로 내려갈 뿐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이라곤 미셸이라는 여자뿐인데 그녀와의 관계도 확실치 않다. 그에게 세상은 낯설기만 하고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아담 폴로는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유사한 존재이지만 그보다 더 극단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 사회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인 아담 폴로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믿고 있는 세계가 갑자기 생경하게 다가온다. 그에게 문명 사회는 거대한 인위적인 체계, 소통이 불가능한 별개의 세상이다. 공격성과 파괴성, 불모성으로 대표되는 기계 문명의 사회, 그런 거대한 인위적인 세상에서 오는 소외감을 인간은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아담 폴로라는 불가해하고 형체를 붙잡을 수 없는 존재는 독자에게 바로 그런 현실을 자각하고 진정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 아담 폴로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아무렇게나 붙여진 것이 아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태양의 신 아폴론을 연상시키는 그 이름은 문명 이전의 사회, 신화적 세계로 회귀하고자 하는 갈망을 드러내고 있으며, 주인공이 보이는 광기 어린 행동은 바로 그 회귀로의 몸부림이다. 금단의 열매를 먹고 이성을 지니게 되기 이전,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분간되기 이전의 인간인 아담으로서, 그리고 기독교가 전래되어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이분되기 이전 자연과 인간과 신이 혼융되어 완전한 하나를 이루고 있던 신화적 세계 속의 아폴론으로서, 아담 폴로는 자신이 보고 느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세계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던진다. ―「작품 해설」 중에서 이 같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여러 번 제기되어 이미 진부해진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서』에서 르 클레지오는 그 어느 작품보다 사실적인 서술로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 질문을 극단에까지 천착시킨다. 요컨대 거대 문명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왜소한 인간 존재에 관한 상세한 조서(調書),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며 이로부터 시작된 르 클레지오의 문제 의식은 이후의 작품에서도 내내 유지된다. 사실주의를 뛰어넘은 사실주의 기법 구사 카뮈의 『이방인』 이후 최고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소설 『조서』는 전통적인 소설 기법을 거부하고 누보로망과도 다른 독창적인 서술 방법을 취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는 이 소설에서 카메라 렌즈로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지극히 객관적이면서(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므로) 동시에 주관적인(렌즈 조작에 의한 결과물로서의 세계를 그리므로) 서술을 가능케 하는, 이른바 펜카메라(stylo-camera, pen-camera) 기법을 구사한다. 더욱이 글을 단편적으로 끊어지게 하거나 중간중간 행들을 삭제시키기도 하고, 신문기사를 삽입하거나, 찢어진 광고지 등을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집중적으로 확대해 제시하기도 하며, 때로는 행을 지운 상태를 그대로 내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마치 영화의 화면처럼 세계를 카메라―펜으로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그대로 제시하려 함으로써, 현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아니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종래의 사실주의적 서술 기법을 뛰어넘은 이러한 르 클레지오의 기법은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사실성을 해체하고, 환상과 현실의 결과를 무너뜨린다. 그 결과 독자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의 현실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어려운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 속도감 있게 읽힌다. 작가 자신이 책의 서두에서 이 작품을 '유희 소설', '퍼즐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르 클레지오는 생동감 있는 문체로, 곳곳에 의문 부호를 남겨두고서, 독자가 부지불식간에 스스로 그 의문을 풀어낼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다. 『조서』는 주인공 아담 폴로가 빈집에서 나와 거리(사회)로 나서고, 사람들의 몰이해로 거리에서 다시 정신병원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르 클레지오는 그의 입을 빌려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진정한 인간 존재를 자각할 것을 촉구한다. 결국 『조서』는 문명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과 세계 속의 인간에 대한 깊은 사고, 그리고 그러한 주제 의식을 정교한 수법으로 드러내는, 근래에 보기 드문 소설이다. |
실존주의와 누보로망의 세례를 받은 르 클레지오는 『조서』에서 타락한 일상 언어를 복구하고 진정한 삶의 본질을 표현하는 힘을 언어에 불어넣는 마술과도 같은 작업을 보여 준다. - 스웨덴 한림원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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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자연의 관계, 인간과 우주의 본질적인 통합에 관해 깊이 사고하는, 우리 시대 유일한 소설가. - 《르 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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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학은 침략하는 문학이 아니라 탐색하는 문학이다. 그러나 르 클레지오는 몽상가가 아니다. 그는 고발하고 투쟁하고 도전하는 작가다. - 《마가진 리테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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