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시절에는 점심을 먹은 뒤 잠깐의 휴식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면 즐거운 시간이 좀 더 늘어날 줄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온종일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오히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시간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해낼 거라고 착각하는데, 시간이 지나치게 많으면 도리어 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 어느 날은 점심 무렵부터 집 근처 온천에 가서 몸을 담갔는데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는 풀어야 할 스트레스도, 피로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자유시간이 하루 7시간 이상일 때 오히려 행복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정말 뼈저리게 동감한다. 시간적인 여유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는 행복의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도 과도하면 행복에서 멀어진다. 부자유에서 벗어난 뒤에는 자유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 우리는 자주 “좋아하는 일만 하자.”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 옳은 말이지만, 편안한 일만 하자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 pp.16-17
예를 들어 내 일기에는 ‘라면을 먹고 과자를 먹었다. 게다가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말았다.’라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이미 라면을 먹어서 결심이 무너졌으므로 뒤이어 과자를 먹든 아이스크림을 먹든 마찬가지다!’라는 식이다. 폭음이나 폭식은 이런 프로세스로 일어난다. 라면도, 과자도 참지 못했으므로 의지력은 사용하지 않았을 테고, 혈당치도 잔뜩 올라갔을 것이다. 그렇게 소중하게 회복한 의지력으로 왜 마지막 아이스크림은 참지 못했을까?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돌아오면 배도 고프고, 의지력도 바닥나지만 우리는 그럴 때 감자칩이나 콜라에 손을 뻗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에 나쁜 식품에 손을 대는 날은, 헬스장에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가지 못한 날이다. --- pp.34-35
사람의 행동은 전제군주제처럼 독단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국회에서처럼 회의를 통해 정해진다. 가령,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고 싶을 때를 예로 들어보자. ‘내일부터 이 시간에 일어나자.’라고 다짐하고, 정해놓은 시각에 알람이 울린다. 국회가 개최된다는 신호다. 신체의 다양한 지역에서 의원들이 모이고, 국회가 열린다. 눈을 떴지만 허리가 조금 아프다. 그래서 ‘허리’ 지역 의원은 “아직 더 자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제 술자리에서 과음을 했다면 ‘장’ 지역에서 온 의원은 “느긋하게 소화시켜야 한다.”라고 말한다. 논의 끝에 ‘잠을 더 잔다.’가 다수결로 가결된다. 결국 알람을 끄고 5분 더 잔다. 5분마다 알람이 반복될수록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하지 않을까?’, ‘매일 늦잠이라니, 한심하네.’ 등의 진지한 의견이 세력을 늘린다. 결국 꾸물거리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p.64
이때 의미 있는 질문은 ‘그것이 내 아이의 습관이 돼도 좋은가?’다. 물론 아이가 없는 사람도 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나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만 가능하면 그만두고 싶은 일, 배울 것이 별로 없고, 내 아이가 그것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찬성할 수 없는 일, 끝난 후 성취감이나 만족감이 아닌 후회가 남는 일…. 우리는 자신의 습관에 대해 ‘어떻게 해도 멈출 수 없다.’며 여러 가지 변명을 한다. 그 습관이 주는 이점은 얼마든지 과장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내 아이의 습관이 되어도
좋은지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식이 알코올 중독자나 니코틴 중독자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자녀가 스마트폰이나 SNS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거나 도박에 빠져 일상생활을 제대로 못하길 바라는 부모가 있을까? --- p.92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구나 보상 자체를 없애는 일은 어렵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반복행동의 내용이다.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이 ‘1+’이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다. 애플리케이션의 버튼을 터치하면 ‘1, 2, 3…’ 하는 식으로 그저 숫자가 늘어가는, 단순한 구조다. 트위터를 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 트위터를 여는 대신에 ‘+’ 버튼을 터치한다. 그 순간 성취감과 보상을 느낄 수 있어서 일단 욕구가 멈춘다. 다리를 꼬는 것이든, 코를 후비는 것이든 ‘1+’는 버릇을 고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버튼을 누르며, 이를 반복행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루의 끝에 ‘10’이든 ‘20’이든 숫자가 쌓여 있으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 pp.112-113
피스타치오는 하나하나 딱딱한 껍질을 벗기는 것이 귀찮기 때문에 다른 견과에 비해 그나마 좀 덜 먹게 된다. 이것을 나는 ‘피스타치오 이론’이라고 부른다. 버리고 싶은 습관이 있다면 이런 피스타치오의 껍질처럼 이용할 것이 없는지 찾아보고, 일단 진입장벽을 높여야 한다. 나는 SNS 애플리케이션을 스마트폰에 설치해두면 나도 모르게 자꾸 보게 되므로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지 않고 웹브라우저
로 본다. 그리고 다 보고 나면 매번 로그아웃을 한다. 이렇게 해두면 보고 싶을 때마다 다시 로그인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패스워드 입력과 2단계 인증을 하다 보면 SNS를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기도 한다. 나는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도 공부하는 습관을 만들기 위해 책상에서 쉽게 도망칠 수 없도록 머리를 썼다. 벽을 등지고 의자에 앉은 뒤 책상을 벽에 가까이 붙였다. 공부를 하다가 잠시 숨을
돌리고 싶으면 무거운 책상을 뒤로 밀어야만 의자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이러한 물리적인 구속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 pp.140-141
일찍 일어나는 요령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는 것은, ‘일찍 일어나기’ 과정의 최종결과다. 사실 추운 겨울에는 이불 밖으로 몸을 밀어내는 일이 마치 천 길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 먼저 눈만 뜬다(몸은 자고 있어도 된다).
● 이불을 반만 걷는다.
● 상체를 일으켜 일단 침대에 앉는다.
● 한 발만 침대 밖으로 내밀어본다.
침대에서 한 발만 밀어냈을 때도 정말 어찌할 수 없이 졸음이 몰려온다면 침대로 돌아가도 좋다고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아침에 늦잠을 자는 이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자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눈을 뜨지도 못한 상태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 pp.147-148
목표를 작게 잡는 데는 또 다른 이점이 있다. 습관을 들이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부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부정’이라는 나쁜 감정이 의지력을 갉아먹으면 다음 행동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1장에서 살펴보았다. 목표를 팔굽혀펴기 1번으로 설정해두면 다른 일이 바빠서 정말로 1번밖에 하지 못하는 날에도 자기부정감이 생기지 않는다. 설정한 목표는 제대로 달성했기 때문이다. 나도 해야 할 일을 두고 할까 말까 고민할 때는 일단 그 장소에 가거나 시작하는 것만을 목표로 정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 “헬스장에 딱 한 걸음만 들어가거나, 러닝슈즈를 신은 순간에
도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돌아와도 돼.” 한 친구도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월요일에는 항상 우울하고 쉬고 싶어. 그럴 때는 목표를 ‘회사에 가서 의자에 앉는 것’으로 정하는 거야. 의자에 앉는 일은 어렵지 않고, 앉으면 자연히 무슨 일이라도 하게 되니까.” --- pp.151-152
나쁜 습관을 버릴 때는 완전히 끊는 편이 좋다. 또한 새로운 습관을 들일 때는 반대로 매일 하는 편이 사실 더 쉽다. 사람들은 보통 일주일에 1번 달리는 것이 매일 달리는 것보다 쉽다고 믿는다. 난이도를 노력의 덧셈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일 하지 않고 일주일에 2~3번이나 이틀에 1번 하는 편이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좋은 습관을 만들 때 그 빈도를 서서히 올리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일주일에 2번 달리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자.’ 하고 결심했다고 치자. 그렇게 결심하고 나면 꼭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오늘이 달리는 날이었나? 전에 언제 달렸더라?’, ‘오늘 꼭 달려야 하나? 영 내키지 않으니까 다음 주에 3일 달려서 횟수를 채우자.’ 이렇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래서 선택과 결단이 필요해지면 동전 던지기를 해야 하는 사태에 이른다. --- pp.155-156
스티브 잡스는 33년간 매일 아침 ‘만약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자문했다고 한다. 나도 한동안 흉내를 내보았지만 곧 싫증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 말을 바꿔 ‘오늘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나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은가?’라고 자문해보았다. 내일의 나는 슈퍼맨이 아니라 오늘의 나와 같은 선택을 한다. 내일로 미루고 싶은 오늘의 일도 영원히 이어진다. --- pp.158-159
어느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 자신이 예상한 시간의 1.5배를 쓴다고 한다. 항상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어서다. 쉽게 말해 10일 만에 처리하려던 일이 실제로는 항상 2주가 걸린다는 뜻이다. 이것 또한 ‘내일의 나는 슈퍼맨이 될 거야.’라는 환상 때문이다. 가슴이 뜨끔하다. 바쁜 편집자 시절에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주말에 출근하면 일이 굉장히 잘되는 기분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생각한 만큼 진행되지 않은 적도 많았다. ‘내일 하루를 온전히 쉰다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겠지?’ 하는 흐뭇한 기대를 할 때도 있었다. 여행을 갈 때는 부족하면 곤란할까 싶어 여행가방에 책을 잔뜩 넣었지만 실제로는 한 권도 다 읽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읽지도 못할 책을 사 모으는 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독서량과 흥미의 지속시간을 과대평가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 pp.173-174
덧셈의 재능과 곱셈의 재능이 있다. 같은 경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덧셈만으로 쌓아 올리는 사람이 있고, 곱셈으로 재빨리 결과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센스’다. 내가 생각하는 센스와 재능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센스 : 습득하는 속도
● 재능 : 지속해서 습득한 기술과 능력
가령 어학을 바로 습득하는 사람에게는 센스가 있다고 말한다. 센스가 있으면 들인 노력에 비해 성장하는 속도가 빠르다. 그러나 센스가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가면 덧셈으로도 언젠가 같은 기술과 능력, 즉 재능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 pp.277-278
나는 처음 습관 만들기를 시작했을 때,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 먼저 괴로움을 느끼고 그 후에 즐거움을 느낀다. = 노력
● 먼저 즐거움을 느끼고 그 후에 괴로움을 느낀다. = 게으름
고통과 즐거움이 찾아오는 순서가 다를 뿐, 노력과 게으름은 거의 같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습관을 지속하다 보니 고락이 무엇인지 더욱 모르게 되었다. 노력하는 중에는 당연히 괴로움과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행위가 끝나면 만족감이 찾아온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지금 내가 느끼는 괴로움이 있기에 그 후에 만족감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