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이 없는 사람의 삶에는 여러 가지 특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늘 군말 없이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토사구팽을 당할 위기에 처하든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면서도 늘 불안해하기도 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군가에게 잘해줬지만, 반대로 이용당하고 무시당하는 ‘쉬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지만 결국 가족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도 역시 주도권을 빼앗긴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 주도권은 이렇게 소중한 인생의 힘이지만, 안타깝게도 딱히 정리된 교과서도 없고 누군가 잘 알려주지도 않는다. 자신의 힘을 지키는 비결 중 하나이므로 가까운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훨씬 앞선 시대에 살면서 주도권을 위해 각축전을 벌였던 사람들의 사례가 있다. 2500년의 세월 속에서 만들어진 동양고전에는 위대한 영웅과 천재적인 참모들, 그리고 나름의 현명함으로 삶을 개척해 온 사람들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오면서 검증받은 것이기에 믿을 만하고 기대어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삶에 지쳐 있는 많은 이가 이 책을 통해 주도권 확보를 위한 용기와 창의적 아이디어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프롤로그 : 파도에 휩쓸려 토사구팽 당할 것인가, 파도 위에 올라타 승승장구할 것인가?」 중에서
『삼국지』 마니아 중에는 가후(賈?)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적지 않은 역사가들이 가후를 제갈공명보다 더 뛰어난 전략가이자, 처세술의 달인이라고 평가한다. 가후의 특징은 강하게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압박하지 않고, 흥미로운 주제를 던져서 부드럽게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상대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 그가 훗날 왕이 된 조조를 모실 때였다. 조조가 장남인 조비(曺丕)와 둘째 조식(曺植) 중에서 누구를 후계자로 삼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가후는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볼 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조가 “무슨 생각을 하시오?”라고 재차 묻자 그제야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원소와 유표 부자(父子)를 생각하느라….” 이 말을 듣고 조조는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소와 유표는 모두 장남을 후계자로 세우지 않아서 결국 내분으로 망했기 때문이다. 강하고 빠른 직구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휘어지고 느리게 가는 커브를 던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일종의 막후정치(幕後政治)를 연상하게 한다.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뒤에서 협상과 조정을 하면서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내는 방식이다.
--- 「PART 1 물어뜯지 못할 거면 짖지도 마라 :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참맛」 중에서
진나라의 평공(平公)이 새로운 왕궁을 건립하고 경축 행사를 열었다. 이때 옆 나라인 위나라의 영공(靈公)도 축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의 일행이 강에 이르러 잠시 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매우 독특하고 매혹적인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이에 영공은 부하들을 시켜 그 거문고 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영공은 급한 마음에 그 소리를 기록해 두도록 했다. 이윽고 진나라의 잔치에 참석한 영공은 흥건하게 취하자, 오는 길에 들었던 거문고 소리가 생각이 났다. 이에 평공에게 거문고를 타도 되겠냐며 청했고, 이에 평공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거문고가 한창 연주되던 중, 자리에 있던 한 관리가 느닷없이 나서서 이렇게 경고했다. “이 노래는 나라를 망치는 노래입니다. 결단코 끝까지 연주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지만 평공은 신경 쓰지 않고 거문고를 계속 연주하도록 했다. 그런데 노래가 끝으로 가자 갑자기 28마리의 학이 몰려들어 날개를 펴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비바람이 거칠게 몰아치고 왕궁의 기왓장이 날아가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결국 행사는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등장한 고사성어가 바로 ‘나라를 망치는 음악’이라는 의미의 ‘망국지음(亡國之樂)’이다. 물론 당시 거문고 소리가 왜 학과 비바람을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 그래서 외부에서 온 것들이 내부로 들어와 기존의 것을 부수고 난장판으로 만든다’라는 점에서는 꽤 의미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 「PART 2 트렌드를 좇으려다 스타일까지 구길 것인가 : 나의 방어벽을 구축하는 세상과의 거리 조절」 중에서
『한비자(韓非子)』에는 기대라는 미끼에 걸려 자신의 소중한 농사를 망쳐 버린 한 어리석은 농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춘추시대 송나라에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늘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풀 속에서 토끼 한 마리가 뛰쳐나와 전력으로 달리더니 밭 가운데의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는 일이 발생했다. 횡재라고 느낀 농부는 이 토끼를 가져다 가족들과 맛있게 먹다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토끼가 저절로 쫓아와 죽는데, 날마다 열심히 일만 했으니 난 정말 바보였구나!’ 농부는 다음 날부터 농사일을 접고 그루터기 앞에서 토끼가 죽어 나가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일구던 밭은 어느덧 잡초만 무성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에서 탄생한 고사성어가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린다’라는 의미의 수주대토(守株待兎)이다. 이 농부가 어리석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한 번의 횡재에 불과했던 일이 계속해서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에 대한 기대는 ‘희망 섞인 바람’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미끼’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 「PART 3 인간관계, 기대는 오버이고 예의는 지능이다 : ‘좋은 사람’ 되려다 ‘쉬운 사람’ 되는 이유」 중에서
말을 조심하라고 말한 고전 속 인물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노자는 특별히 말에 관해 경각심을 가지라고 조언한 인물이다. 우선 노자는 말을 ‘욕망’, ‘날카로움’, ‘빛’ 등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모두 말이 가진 긍정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타인의 욕망을 알아낼 수 있고, 날카롭게 무엇인가를 지적해서 고칠 수 있게 하며, 또 어두운 것을 드러내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노자는 그것으로 인한 이로움보다는 손해가 더 크다고 보았다. 그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입을 다물고 욕망의 문을 닫아라. 날카로움을 꺾고 엉킨 것을 풀어라. 빛을 가리고 먼지와 같이 되어라. 이것을 본래의 하나 됨이라 하네. 이렇게 된 사람은 벗도 적도 없고,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으며, 귀하지도 천하지도 않다네. 그러므로 이것이 하늘 아래 가장 귀한 것이라네.” 노자는 결국 입을 다물어 욕망의 문도 닫고, 날카로움도 꺾고, 빛도 가리라고 조언한다. 한마디로 말을 줄이면 곤란한 일도 줄어들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태야 말로 벗은 없겠지만 적도 없으며, 이롭지는 않아도 해롭지 않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바로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다. ‘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지니 중간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는 의미이다.
--- 「PART 4 인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안목이 없는 것이다 : 사람과 관계를 보는 안목으로 주도권을 지켜라」 중에서
청년 시절의 백범 김구 선생을 가르쳤던 고능성(高能善)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나뭇가지에 높이 오르는 일은 결코 기이한 일이 못 된다. 벼랑에 매달려 있을 때 손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대장부이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손을 뿌리치다’라는 의미의 현애살수(懸崖撒手)는 용맹한 결단력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라는 의미이다. 정치적으로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이 무엇인가를 포기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말은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준다. 그들에 대한 관심을 뿌리치는 적극적인 무관심이야말로 빼앗겼던 내 마음을 되찾고, 넘어갔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는 현명한 방법 중 하나이다.
--- 「PART 5 한계를 돌파하려면 선부터 넘어야 한다 : 주도권을 가로막는 심리 상태의 극복」 중에서
전국시대 한나라에는 왕의 두 아들인 구(咎)와 기슬(幾瑟)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이때 구를 돕던 재상은 공숙(公叔)이었다. 구와 기슬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결국 기슬이 국외로 추방되는 선에서 승리는 구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구를 돕던 공숙은 여전히 살아 있는 기슬이 마음에 걸렸다. 언제 복수심을 품고 돌아와 구와 자신을 해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국외로 추방되기 전 자객을 보내 기슬을 암살하려는 계책을 짰다. 그런데 이때 공숙의 신하 한 명이 그를 막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제까지 태자 구가 공숙 님을 중하게 여겼던 것은 기슬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기슬이 죽어서 태자 구의 마음에 근심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공숙 님을 가볍게 볼 것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기슬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만, 태자 구도 공숙 님에게 계속해서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공숙은 크게 깨달음을 얻고 암살 계획을 취소했다. 공숙은 관계의 역학을 지나치게 단편적으로만 바라보았다. 태자 구와 자신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 관계가 얼마든지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상황을 보다 역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사람이 공숙의 신하였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등장하는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고사성어도 관계의 역동성을 말한다.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하지만,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풍랑을 만나면 서로 돕기가 마치 좌우의 손과 같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은 그냥 미워하는 수준이 아니다.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서로를 적대적으로 여겼다. 하지만 상황이 변하자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관계를 변화시켰다.
--- 「PART 6 이끌거나, 따르거나, 비켜서거나 : 사회적 위상의 역동성을 만들어 가는 지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