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은 미래가 하는 생각까지 꿰뚫어 볼 정도로 가까웠는데, 다이어트를 한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미래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지옥 같은 고등학교 생활도 미래와 함께라면 잘 견딜 수 있으리라 믿었다. 수많은 암기와 문제 풀이와 시험이 주는 스트레스도 사라지게 하리라 철석같이 믿었다.
“배신자…….”
눈물이 고였다. 휴대폰에서 미래의 이름을 ‘영혼의 단짝’에서 ‘배신자 2’로 수정하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민정에게 다이어트는 ‘배신자 1’로 시작되었고, ‘배신자 2’로 이어졌다.
--- p.12, 「배신자들」
예은은 초등학교 때 조각칼을 잠깐 잡아 보았다. 그때 조각칼이 빗나가 나무판을 잡은 왼손을 찔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손을 보면서 조각칼을 떨어뜨렸고, 그 뒤로 다시는 조각칼을 잡지 않았다. 예은에게 조각칼은 아찔한 통증이자 상처였고 핏방울이었다. 그런데 범수는 예은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던 조각칼을 약간의 설렘과 기대를 갖게 바꿔 놓았다. 재현에게 조각칼은 무엇이었을까?
--- p.58, 「만약 무인도에 간다면」
‘업데이트를 하세요.’
뒷목이 뻣뻣해졌다. 유튜브, 포털 사이트, 알람 앱에 모두 똑같은 문구가 떴다.
“맙소사! 이게 뭐야?”
예슬의 휴대폰은 온통 ‘업데이트를 하세요’로 가득했다. 혜원이 예슬에게 다가왔다.
“네 것도 업데이트하래?”
“너도?”
“야, 말도 마. 아무것도 안 열려.”
민지가 혜원에게 어서 가자고 손을 잡아끌었다. 예슬은 멀어지는 혜원을 물끄러미 보았다. 혜원이 민지가 한 말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말을 걸었다. 종일 이상한 일만 일어났다.
--- pp.89~90, 「업데이트를 하세요」
유하가 알려 준 사이트는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굳게 닫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하는 열쇠 없이 들어갔지만, 나는 열쇠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열쇠를 어디에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이트 주소를 다시 클릭하니 관리자에게 쪽지를 보내는 기능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글을 남겼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낯선 사람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
‘이곳에 접속하길 원하십니까?’
열쇠를 가질 기회였다. 낯선 사람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친구가 알려 줬어요. 사진 몇 장만 찍으면 된다고 해서…….’
(……) 그가 닫힌 문을 열어 준다면 새 휴대폰을 획득할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었다.
‘그러세요.’
그 답글로 또 다른 블랙홀이 열렸음을 그때는 몰랐다.
--- pp.113~114, 「내 블랙홀은」
하루 이틀이면 풀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상황이 점점 나빠졌어요. 스포츠댄스, 탁구, 헬스, 요가를 배우던 사람들이 감염되었죠. 건강하게 살기 위해 운동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솔라드 바이러스를 옮겼어요. 환기가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서 일하던 콜센터 상담사들, 교회에서 예배 보던 교인들, 그리고 노인과 장애인 들이 시설에서 감염되었어요. 감염자 숫자를 표시한 그래프는 매일 올라갔어요.
--- p.151, 「우리에겐 오븐이 있고」
나는 반 단톡방에 들어 있지 않았다. 처음 초대되었을 때 슬며시 빠져나왔고, 또다시 초대되었을 때도 빠져나왔다. 그 뒤로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섞이는 건 골치 아팠다.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야 하고, 서로 눈치를 보고, 생각을 나누는 게 싫었다.
--- p.181, 「이토록 흐릿하거나 뭉개지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