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웅은 유연지를 잊지 않았다. 그저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연지와 다시 만나는 순간에 대한 조화롭고 완벽한 과정의 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수천만 번이나 재현되고 발전한 나머지 그 상상의 장면은 허공 속에서 쓰다듬은 수천만 번의 손길에 의해 매끄럽게 다듬어진 하나의 단단한 대리석 조각상이 되어 서 있었다. 그는 이제 실물이나 다름없이 확실해진 그 석상을 오른쪽과 왼쪽, 위쪽과 아래쪽에서 모든 각도로 지켜보고 만질 수 있었다. 집착조차 오래전에 잊었다는 듯 무덤덤한 그의 목소리는 그 재회의 장면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이 순간까지 신화적인 인생의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디뎌왔음을 분명히 암시했다.
--- p.143
“저기 살아? 저기가 재웅이네 집이란 말이야?”
“저기 꼭대기 층이에요.”
에클바이오와 에클코인을 거쳐 T타워에 이르는 그 믿을 수 없이 비인간적인 역정을 손가락을 다 펼 필요도 없이 가벼운 손짓으로 요약하기 위해, 그처럼 대수롭지 않게 연지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재웅은 이날까지 살아왔다. 하나도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위장하기 위해, 그리고 그 순간 필연적으로 연지의 얼굴에 스칠 망설임을 무마하기 위해, 재웅은 유러피안 앤티크 가구와 케이크와 티 세트와, 그리고 킹스포인트와 나까지, 아마도 공들여 준비했을 것이다.
--- p.182
재웅은 말하지 않고도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을 몰아가는 힘이 있었다. 신입생으로 동아리의 막내였을 때에도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이 그에게 신경을 썼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했고 무엇을 원할지 짐작하려 애썼다. 그가 요구하거나 주장하지 않아도 일은 그의 생각대로, 아니 우리가 그의 생각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대로 흘러가곤 했다. 그가 입을 열어 자기 생각을 명확히 밝힌다면, 반론이 따를 때도 있긴 했지만 거의 반드시 그대로 되었다. 그가 가진 신기한 힘이었다. 떠밀려 강요당하는 느낌을 받지 않으며 그의 생각대로 움직였던 그때처럼 지금도 그 자장을 강력하게 느꼈다. 사람의 신경 물질 전달 과정에 ‘반드시’라는 이름을 가진 수용체가 있다면, 재웅은 정확하게 그 수용체를 자극하는 어떤 페로몬을 폭발적으로 분비했다. 재웅은 내가 연지와 그 사이를 도와주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왠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 pp.193~194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와 여러 대륙을 몰고 다닌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가 이룬 모든 일을 추동한 희망의 근원 앞에 다시 서서 그것을 마침내 얻으려는 황홀한 순간에 나는 잔인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말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지독한 질문이었다.
--- p.196
“누나, 이제 이 바보들 속에서 빠져나와. 누나는 그저 의무를 다했을 뿐이지, 한 번도 그들을 사랑한 적이 없어. 이제 됐어. 이제는 누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
--- p.236
우선은 에클타워를 떠나야 했다. 에클타워뿐만 아니라 이 골치 아픈 모든 소동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냥 어딘가에 존재했을 나의 조용한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광채와 유연지, 강재웅, 뉴욕과 성수동과 압구정동과 추석의 코스모스까지 모두 떠난 어떤 고요한 장소를 간절히 소망했는데 세상에 과연 그런 곳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광채의 벤틀리를 주차대행 직원이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마이어 여사의 분노가 진정되기를, 연지가 어렵게 선택한 두번째 사랑이 시작하자마자 거센 풍랑을 만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남몰래 두 손가락을 꼬았다.
--- pp.239~240
신은 그런 식으로 못된 장난을 친다. 가장 진실한 표현력을 가진 얼굴 뒤에 결코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을 숨겨놓는다. 아주 간단한 트릭인데 인간은 거의 틀림없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실은 나 역시 아직도 헷갈린다. 많은 사람이 재웅의 말과 약속을 담은 여러 기록들을 재생하며 그 모든 일이 어쩔 수 없었음을, 그가 다시 일어나 K-영웅 스토리를 이어갈 것을 믿었다. 말과 표정, 몸과 자세, 학벌과 경력, 그가 가진 모든 것이 진실성을 담보했다. 이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그가 다시 나타나 그 표정, 그 목소리로 다가온다면 나는 또다시 혼란 속에 빠지고 말 것이다. 호리호리하면서도 강인한 그의 몸, 진중한 얼굴, 무엇보다도 그 나직하게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나는 또다시 나 자신을 의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 한다. 신이여, 이번에도 마음껏 즐겼는가? 나는 더이상 그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
--- pp.25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