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직업도 없고 집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불 꺼진 방에 누워 내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우두커니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에밀 시오랑의 글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래, 이것이 밤이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중략) 운 좋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지만 내가 불면의 밤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에밀 시오랑의 『태어났음의 불편함』 덕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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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앓는 ‘마음의 병’은 시대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논픽션 작가 사이쇼 하즈키의 『아주 조용한 치료』입니다. 사이쇼 하즈키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마음의 병을 비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병도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 중 하나가 일본 후생노동성이 매년 실시하는 ‘정신질환이 있는 총 환자 수의 추이’입니다. 1989년 약 204만 명이었던 환자 수는 2014년에는 약 392만 명으로 대폭 늘어났습니다. 정신장애를 앓는 사람이 계속 느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p.69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는 『세계는 증여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책을 통해 신뢰는 조건 없는 ‘증여’가 전제되어야만 생겨난다는 것을 주지시킵니다. 지카우치 유타는 ‘업무상 아는 사람’과는 왜 친구가 되기 어려운지를 물으며, 그 대답으로 “서로를 수단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도와줄게. 그러면 넌 나한테 뭘 해줄 거야?” 이것이 ‘기브 앤 테이크 논리’, 즉 교환의 논리로 살아가는 인간의 도그마입니다. 더 이상 주고받을 것이 없어졌을 때 교환의 논리는 관계를 끊기를 요구합니다. (중략)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어른의 사회는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사회, 곧 자신의 존재가 누구에게도 필요 없어지는 사회가 아닌가”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 p.75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때때로 ‘행복의 이미지’가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는 가장 알기 쉽고 강력한 행복의 상징이며 결혼하면 ‘당연히’ 생긴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세상에는 아이를 갖지 않는 사람도,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난임 및 불임 부부도 많습니다. (중략) 상상력이 약해지면 공감력도 약해집니다. 브래디 미카코가 가르쳐준 것처럼 엠퍼시가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함’이라는 필터로 세상을 바라보면 상상력의 우산을 펼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인의 신발을 신어볼 수 있을까요?
--- p.78
우리의 일상은 누군가가 만든 ‘상품’으로 유지됩니다. 상품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집을 나와 역까지 가는 짧은 길에도 사고 싶은 상품과 매력적인 서비스가 즐비합니다. 사고 싶은 상품을 손에 넣으려면 돈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동료가 첫발을 내디딘 것처럼, 자신이 먹을 것을 돈을 주고 소비하지 않고 직접 만들 수 있다면 굶을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내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삶이 아니라 내 시간으로 만든 것을 교환하는 삶입니다. 먹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동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일하기 방식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 p.106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줄곧 출세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동기가 출세했는지가 늘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이유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당시의 내 기분을 언어화하면 ‘남들처럼 돈을 벌고 싶고 내 나이에 걸맞은 자리에 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다’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중략)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왜 나는 출세하고 싶어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부자인지 가난뱅이인지, 유명한지 무명인지의 차이는 단순히 ‘자유의 차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감탄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던 자유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쉬고 싶은 날에 쉬거나, 마음이 내킬 때 휴가를 잡거나, 출근 시간을 내 마음대로 정하거나, 개인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조정할 정도의 자유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바라던 자유의 크기가 작아서 좀 실망했지만, 그 덕분에 ‘꼭 출세할 필요는 없겠구나’ 하고 깨달았고 사는 게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 p.108
“당신이 하는 일은 세상에 의미 있는 공헌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한 편의 칼럼이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11개국 이상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처음 칼럼이 게재되었던 웹진 〈스트라이크!〉의 서버는 계속해서 다운되었고, 조회수는 100만을 기록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읽으며 계속 확산된 이 칼럼은 무정부주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기고한 “불쉿 직업이라는 현상에 관하여”입니다. ‘불쉿 잡’이란 그가 만든 단어로, 『불쉿 잡』에 따르면 “피고용인 본인조차 그 존재를 정당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유해한 유상 고용 형태다. 그렇다고 해도 그 고용 조건의 일환으로 본인은 그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업무입니다. 그레이버는 어째서 이런 칼럼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요?
--- p.123
“현대는 돈과 빚의 시대이며 후세에는 아마 ‘채무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이처럼 도발적인 말을 남긴 이색 사상가가 있습니다. 한때 공산권이었던 체코공화국 출신의 경제학자 토마스 세들라체크입니다. 그는 경제학을 선과 악의 시점에서 고찰한 『선악의 경제학』으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세들라체크는 ‘채무와 이자가 없는 현대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는 동전이든 지폐든 돈의 가치는 매개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화폐는 신용이자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 p.144
『삶으로서의 은유』의 일본어판 번역가 와타나베 쇼이치는 역자 후기에서 ‘Time is money’라고 처음으로 단언한 사람이 벤저민 프랭클린이며, 이 말이 유포되기 시작한 때가 산업혁명과 같은 시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메타포가 보급되면서부터 ‘time’에 대한 동사, 형용사, 글의 구성 등이 ‘money’와 동일한 의미로 변하고 이 단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좌우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 p.158
일본의 과학기술청에서도 ‘생활이 편리해지고 의학 발달로 수명이 늘어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라는 주제로 실증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뜻밖에도 ‘지루함’이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현대인이 생산성을 향상시켜 획득한 ‘지루함’이야말로 고뇌의 본질이라고 갈파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블레즈 파스칼입니다. 그는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다룬 고전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모두 단 하나의 일, 즉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 p.235
와카마쓰 에이스케가 『슬픔의 비의』로 독자에게 호소한 것은 독자만의 깊은 상실 체험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실 거기에 쓰인 이야기가 아니라, 읽음으로써 터져 나오는 우리 내면의 목소리일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살아있는 한 반드시 누군가를 떠나보냅니다. 둘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을, 친구를 떠나보냅니다. 누구나 읽고 싶은 책을 전부 읽을 수 없고, 이루어야 할 일을 전부 이룬 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애독한 책이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나서도 언제까지나 독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듯이, 깊은 슬픔은 사람의 마음에 남습니다. 그 슬픔이 써내려간 말들은 마치 기념비처럼 우리 눈앞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 p.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