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바닥엔 바닥이 없어 갈매기 한 마리
프레스토로 떠 있다 퍼덕이는 이 마음
크레센도로 떠 있다 젖은 머리 쓸어넘기는 시퍼런 몸뚱이
담뱃불 지피는 얼굴 없는 청년들 갔던 길 돌려놓고
영원처럼 걸어오는 한 세기 전의 소녀들 파도 사이로 숨었다
슬며시 고개 드는 검은 암초들 스러지기 위해
미친 듯이 피어나는 거품들 피어오르기 위해
곤두박질 치는 이 마음 번쩍이는 빙벽엔
발 디딜 곳 없어 갈매기 한 마리 프레스토로 떠 있다 꿈을 꾼다. 돌멩이로 채운 배낭을 메고 땅 끝에서 걸어온 너 해변의 톱날로 허리를 켜는 너 소리없이, 슬로 모션으로 넘어가는 너 돌멩이로 채운 배낭을 베고 꿈을 꾼다. 동굴 같은 너의 잠속을 누군가 뛰어간다 누군가 기를 쓰며 기어간다 볼을 비비고 가슴을 비빈다 너무 벅찬 모래주머니 모난 기억 부서지고 둥근 기억 으깨지는 팥죽사랑 누군가 자꾸만 너의 잠을 빌려 꿈꾼다. 꿈꾸며 죽어간다.
영원처럼
잠옷을 입은 여자들이 이성을 잃은 남자들이 꾸역꾸역 네게 온다 백주에 병나발을 불며 기적처럼 물 위를 걸어온다 하룻밤 새 인생의 절반이 후딱 갔으니 어쩔 건가 차마 죽지 못하는 여자들이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남자들이 자꾸만 네게 온다 햐, 거 참, 말짱한 정신으로
함정처럼
세상의 깊이가 널 창으로 만들고 세상의 두께가 널 칼로 만들었다고?
묽은 독약처럼 네게 죽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쉴 때 차가운 안개 맨몸으로 호수를 덮었다고? 덮어 가렸다고?날아오르는 마음엔 날개가 없어
갈매기 한 마리 어둠으로 떠 있다

빛, 한 칼에 베어진 해변이 있다. 소리, 귀 떨어진 백사장이 있다. 길, 발 없이 서 있는 당신이 있다. 눈, 당신을 불사르는 수평선이 있다. 무한의 절반이 있다.

길댈 곳이 없으면 이윽고 당신도 자신만을 보게 될까요? "당신은 지금 무한의 절반을 보고 있는 거요"라고 정말처럼 거짓말처럼 바다 저쪽에서 한 시인이 말했답니다 나직한 시대의 어두컴컴한 계곡에서도 걷잡을 수 없이 열리는 입 그 안에서 정말처럼 거짓말처럼 구체적인 무한이 자라납니다

도처에 내가 있다. 떨리는 손길로 시린 마음을 덮고 무한의 절반으로 누워 있는 당신, 불 꺼진 세계가 있다.

저수지 바닥에 엎드려일 년을 기다린 이무기처럼번개를 타고 천둥 소리를 타고빗물 고인 이 땅 떠나가는 불꽃 하늘 하늘 하늘발 디딜 데 없는 허공에몸을 띄운 죄 감히환하게 사위를 비춘 죄 잠시나마몸 무거운 지상에 거꾸로 매달린 죄다시 속죄의 한 해를 잉태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