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인간의 초상을 담담하게 그려낸 수작.
인간의 고독과 소외감 그리고 좌절감을 그린 영화
멀리’라는 의미의 터키 영화 <우작Uzak>은 사진가 마흐무트(Mahmut)와 실업자 유수프(Yusuf)의 짧은 동거기를 다루고 있다.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한 제일란(Nuri Bilge Ceylan) 감독은 두사람의 만나고 헤어짐을 통해 공과 사, 예술과 일상, 부유함과 가난함, 젊음과 늙음 등의 대립상이면서도 어찌 보면 동전의 앞뒤처럼 맞닿아 있는 인간의 양면성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다. 마흐무트는 사진가로서 이미 성공한 중년의 사내이다. 늙은 어머니는 병원에 있고, 아내와는 이혼했으며, 때때로 만나 잠을 자는 여인이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었던 이도, 떠나간 이도 여성인 셈이다. 다소 꼼꼼한 성격의 그에게, 어느 날 먼 친척인 청년 유수프가 찾아온다. 인플레이션이 없는 달러를, 여행을 하면서 벌겠다는 이유로 선원이 되고 싶어하는 유수프는 직장을 잡을 때까지 마흐무트의집에서 묵기로 한다. 마흐무트의 공간에 또 하나의 남성이 침입한 것이다.
냄새나는 신발을 함부로 벗어놓고, 한심하게 일자리를 찾지도 못하는 유수프는 점차 마흐무트에게 짐이 된다. 그러나 마음대로 포르노 영화를 볼 수 없고, 정부를 찾아오게 할 수 없는 이면의 일상이 마흐무트를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일란 감독은 이 지점을 집요하게 추적해간다. 성공한 사진사인 마흐무트와 한심한 실업자인 유수프의 대립상을 포르노 영화를 좋아하고, 전화를 엿듣고, 가방을 뒤지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마흐무트와 전화를 몰래 사용하고, 여자의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일거리가 생겼다고 거짓말하는 유수프의 대비로 흥미롭게 만들고, 두 인물을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부딪히게 하면서 효과를 확장한다.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때, 마흐무트와 유수프는 한 사람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아니 <우작>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얇은 실로 맺어진 하나의 인생이라 주장할 수 있다. 마흐무트가 “너처럼 한심하게 살진 않았어!”라고 유수프에게 말하지만, 그가 그 만한 나이 이스탄불에 빈손으로 올라왔다는 사실 말고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 유수프가 항구 옆 술집에서 만난 노년의 선원은 자신의 일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마흐무트의 미래일 수 있다. 나아가 아픈,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들(마흐무트와 유수프가 같은 인물일 수 있다는 증거는 아픈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 이외에도 마흐무트가 노출이 심한 패션쇼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어머니 집 신과 같은 프로그램을 유수프가 보고 있는 마흐무트 집 신이 맞물려 있는 편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수프가 뒤를 쫓아 다니던 여인은 이혼한 마흐무트의 전 부인이 될 수도 있고, 애인이 있으면서도 마흐무트와 섹스를 나누는 정부가 될 수도 있다.이러한 방식의 구조를 통해 <우작>은 이스탄불의 한 집에서 함께 한 장년과 청년의 짧은 몇 날을 다루면서, 인생과 예술의 전체에 대한 관망을 시도한다. 여기에 사용한 감독의 연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이것은 최근 ‘예술(흔히 영화제용 영화라고 불리는)영화’에서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느린 팬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인물의 이동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주로 인물을 둘러싼 환경을 횡으로 무한히 확대함으로 인해 생각의 깊이를 심화시킨다.
둘째 한 템포 빠르거나 다소 튀는 편집을 선호한다. 이는 인물의 행동이나 내러티브의 평이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셋째 인물은 이중적인 내면을 가지고 있다.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을 지향하는 것은 ‘할리우드 식’이라고 폄하되기 마련이다.
넷째 주제의 진행 방식은 모호한 대립구조를 통해 권태의 느낌을 풍긴다.
관객은 스토리의 진행과 결과가 명확할수록 철학의 깊이는 얕아진다고 생각한다.
<우작>이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까닭은 위에서 나열한 이유의 그물에 걸릴 것이라 자신한다. 이를 통해 하나의 인물이면서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다른 인물들로 생각한다면 상대성을 하고 있는 캐릭터들과 특정한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추측을 할 수 있게 하는 사고의 다양성이 구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것을 잘 버무리는 것이 진정한 감독의 역할이다. 그것만이 잘못된 편집과 불안한 프레임 구성과 불균질한 톤과 포커스 아웃된 컷의 존재를 잊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작>은 성공한 영화다.
<우작>의 시작과 마지막 시퀀스는 결코 놓칠 수 없는 부분들이다. 영화는 눈 덮힌 마을을 등에 지고 들판을 건너 걸어오는 한 청년, 유수프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는 프레임 인& 아웃을 통해 산과 길로 올라서고, 자동차를 세워 올라탄다. 이때 페이드 아웃되며 타이틀이 뜨고 한동안 배우와 스텝의 이름 외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운드가 자동차가 달리던 길에서 여자가 있는 실내로 자연스럽게 변해있다는 점이다. 페이드 인된 스크린에는 근경의 어둠에 한 남자, 마흐무트가 앉아 있고 원경의 보다 밝은 침대에 한 여인이 포커스 아웃된 상태에서 옷을 하나씩 벗고 있다.
뽀드득 거리는 발자국과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를 담은 유수프가 등장하는 신과 어둠 속에서 잠자리에 들 여인과는 무관한 듯 앉아 있는 마흐무가 등장하는 신이 연결되어 있는 시퀀스이다. 감독은 이 짧은 신의 연결을 통해 불안하고 숨가쁜 청년과 나른하고 권태로운 장년의 현재를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소리는 영화 전반을 통해 적절히 응용된다. 감독은 발 소리, 자동차소리, 풍경소리, 바람과 파도소리 등 자연과 일상에서 들리는 사운드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 소리들은 인물의 심상을 말없이 대신 이야기해줄 뿐만 아니라, 시공간의 이동을 연결시켜 영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한다.
마지막 시퀀스는 시계 도둑으로 몰린 유수프가 마흐무트의 집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발코니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모습과 멀리 떠나는 배를 보여주는 것으로 빠른 진행을 보이는 이 시퀀스는 캐나다로 떠난 전처의 모습을 숨어서 바라보던 마흐무트가 집에 돌아와 유수프가 흘리고 간 (마흐무트가 싸구려라고 피우지 않는다 무시했던) 담배를 집는 것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신은 파도가 치는 항구의 벤치에 앉아 있는 마흐무트의 모습이다. 모두가 곁을 떠난 그 외로운 순간에, 그는 무료한 하품을 늘어지게 한다. 주머니를 뒤지는 마흐무트. 유수프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그러나 결코 눈물을 글썽이거나, 감상에 젖어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아내지 않는다. 다만 수염이 난, 초췌한 중년 사내의 빛을 잃는 눈을, 별 생각 없이 부서지는 파도의 끝을 쫓는 눈빛의 얼굴을 잡아낼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우작>은 충분히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