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를 관통하는 근세와 근대 세계화의 흐름을 살펴보면, 조선이 결코 완전히 은둔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및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근대 세계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교류는 조선의 문화적, 경제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국제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조선은 자신만의 독특한 글로벌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부산은 특유의 무역 및 문화 해양사를 발전시켰다. 초량 왜관에는 일본 선박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19세기 초에는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 세계화와 중국 및 일본 상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부산 특유의 세계화와의 연결은, 이지항의 표류기에서 잘 나타난다. 문자 전통과 소비 문화를 공유하는 일본의 엘리트와의 교류를 통해 부산의 엘리트와 송전번의 엘리트들이 가진 문화적 동질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문자 전통이 없는 아이누 인들과의 교류에서는 이러한 동질감을 형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 「은둔의 나라? 해양사로 본 조선과 부산의 세계화」 중에서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1945년 해방으로 조선과 부산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돌아가고, 일제강점기 해외로 나갔던 귀환동포들이 입국했다. 귀환동포 대부분은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거나 일제 말에는 강제로 고국을 떠났던 자들이었다. 1947년 초까지 약 200만 명이 입국하였고, 이 가운데 약 70%가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전쟁 말기 일본에서 전쟁공포를 경험한 조선인들은 혹시라도 모를 일본인의 박해를 피해 서둘러 조선에 가까운 야마구치나 규슈 지역에 모였다. 하지만 이들의 귀국길은 쉽지 않았다. 힘들게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연고지를 찾아 떠나는 것도 어려웠다. 부산항에는 20만 명 전후의 귀환동포들이 정착했다. 이들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일본화폐는 조선화폐로 교환하는 데 제한이 많았고, 일본에서 챙겨온 화물은 통제를 받아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게다가 1946년 초 미곡 부족과 콜레라 유행은 이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부산에 정착한 귀환동포에게 시급한 것은 주거공간이었다. 행정당국이 제공하는 수용소는 대부분 창고여서 생활환경에 적합하지 못했다.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 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시내 공터에 노숙을 하거나 산으로 올라가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 「부산의 계단과 축대」 중에서
항만 ‘덕분에’ 성장한 부산은, 그 항만 ‘때문에’ 오히려 기형적 도시로 변했다. 항만 기능을 최적화하고 효율화하기 위해서 건설한 도로와 철도 때문에 도시 공간은 오히려 임의로 분할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도로는 육중한 컨테이너 트럭 때문에 늘 만신창이가 됐고, 고용과 경제 활성화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항만은 교통 불편과 쾌적하지 않은 환경을 시민들에게 강제했다. 그것이 개항 이후 140여 년 동안 부산항에서 일어난 ‘일상 아닌 일상’이었다. 항만은 결코 가깝고 친근한 공간이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항만구역을 표시한 임의의 장벽은 사라졌고, 슬리퍼를 신고도 찾을 수 있는 북항으로 변했다. 부두에는 층층이 쌓인 컨테이너를 대신해서 붉고 노란 꽃들로 가득한 공원이 조성됐고, 공원을 ‘낚싯바늘’ 모양으로 가로지른 수로에는 시민 안전을 위한 조명등이 곳곳에 켜졌다. 열린 항만은 새로운 꿈의 시작이다. 부두 기능이 사라진 부산항은 비록 일부라고 할지라도 우리 삶 속으로 돌아왔고 그것은 지금까지 꿈꾸지 못한 미래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 「닫힌 항만, 열린 항만」 중에서
도항과 밀항은 식민지 ‘인후(목구멍)’ 도시로서 부산이 지닌 관문 도시적 특성(‘관문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도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이동에 대해 서구 제국주의와 같이 불균등성과 ‘차이적 접근’을 드러내 놓고 노골화했다. 일본은 영토의 확장과 함께 제국/식민지라는 관계를 특유의 ‘내지(일본) 연장’과 그에 따른 ‘동화’라는 수사적 이데올로기를 동원하며 이전의 국가적 경계와 장벽이 없는 자유로운 이동을 표면적으로 전제했다. 하지만 제국과 식민지 즉, 일본과 조선을 내지와 외지, 법역과 법외역(국적법)으로 구분하여 공간적·민족적 차별을 이면화하면서 불균등한 이동을 심화시켜 제도화했다. 이는 곧 차별적 ‘재영토화’라고 할 수 있다.
--- 「부산과 서발터니티」 중에서
전쟁의 경험과 기억이 만들어낸 잠재의식과 기질적 특성을 키워드로 정리해보자면 아마도 혼란, 아비규환, 궁핍, 생존, 강인함 등이 될 것이다. 이런 전쟁의 경험 및 기억에서 비롯되고 형성된 잠재의식은 부산 곳곳의 인공물과 조형물에 반영되어 있다. 엄청난 위용을 뽐내는 50층 이상의 고층건물들이 가장 많은 도시가 ?서울이 아닌? 부산인 것도 우연이 아닐 테고, 또한 허남식 부산시장 시절의 슬로건인 ‘크고 강한 부산’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혼란과 궁핍 속에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다 보니,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 필요한 심적, 시간적, 실천적 여유가 생길 수 없었으리라. 이러한 여러 배경과 요인들로 인해 부산은 낯선 자, 타자, 나와 상관없는 자들에 대해 열려 있지 않고, 호의적이지 않은 지역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특히 비주류적이고 취약한 자들이 살아가기에 팍팍하고 험악한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경계짓기(장벽 쌓기)와 경계넘기(환대하기)」 중에서
그렇다면 부산의 지역감정, 부산 사람들의 공속감각을 만들어내는 이 지역의 공통적 표상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김영삼을 지지했던 야도(野都)의 정체성이나 유신체제의 종막을 이끈 부마항쟁의 역사를 내세우며 정치적인 정동을 자극하고, 또 어떤 이는 야구 도시 부산의 유별난 팬덤 문화를 자랑하며 롯데 자이언츠라는 구단의 편력에 깃든 기억들을 호출해 끈끈한 동지애 를 부추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산을 표상하는 그 숱한 상징의 소재들 중에서도 한반도 남단의 거대 항구도시라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따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바다를 끼고 있다는 그 입지적 조건에서 비롯되었던 역사적 곡절과 사건들, 그러니까 조선통신사, 관부연락선, 귀환동포, 피란수도, 원양개척 등과 관련된 그 숱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야말로 부산이라는 지역을 집단적으로 장소화하는 가장 유력한 표상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부산의 작가들 중에는 바로 그 해역의 시각으로 이 도시의 역사를 기리거나, 바닷사람들의 억척스럽고 끈질긴 생존과 생활을 파고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부산이라는 공간이 하나의 지방으로서 특별하게 호명되고 그 특유의 정체성을 얻게 되는 것도 예의 그 본질주의적인 실체화의 과정, 즉 특정한 표상의 반복적인 서사화(장소화)라는 담론의 정치를 통한 것이었다.
--- 「지방문학, 혹은 고유한 것들의 장소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