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돌아온 건 맞지만 그저 껍데기만 돌아온 데 불과했다. 일찍이 자신이 좌절을 맛보았던 사랑의 사막 밖으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열렬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문제라면 시간이 흐르며 결국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데 동의했지만, 그를 집어삼킨 사막은 그보다 훨씬 넓고 막막한 지대였다. 그건 인간에 대한 사랑,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의 사막이었으며, 부드러움과 연민의 사막이었다.
--- p.28
“그런데 왜 이 모든 얘기를 저한테 하는 거죠?”
“왜냐고?” 가판점 주인이 무슨 대답을 시도해 보려는 사람처럼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어쩌면 권태를 몰아내기 위해선지도 모르지. 권태보다 나쁜 건 없으니까. 그건 아무렇지도 않은 낯짝으로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우리를 무력화시키고, 타인에게든 자기 자신에게든 만사에 시큰둥해지도록 만들거든. 녹이 스는 것과도 같은 이치야. 음흉하고도 탐욕스럽게 조금씩 우리의 지성과 마음과 정신을 갉아먹고 우리의 기억을 훼손시킨단 말씀이야. 마지막에 떠오르는 거라고는 종양이나 무사마귀 같은 몇 점의 경화된 추억이 전부가 돼버리지. 실연의 아픔도 그렇듯이 말이야. 그건 시력도 망가뜨려 우린 대상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리지. 계속 작은 쌍안경을 통해 흐릿하게 혹은 한쪽 눈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이야.”
--- p.80
“사랑한다는 건 아마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 보살핀다는 뜻일 거예요. 마다하는 기색 없이, 구체적인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요. 사랑한다는 건 우리가 품은 관념들이 아니고 그날그날의 행동이고요. 호숫가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은, 특히 이보와 관련된 질문은 모두 잘못된 것들이었죠. 우린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거지, 나중에 모든 게 끝나고 나서가 아니에요. 안 그런가요?”
--- p.102
"...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봐도 사람들 모두가 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어. 각자 자기만의 기벽이 있는 데다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나 표현이나 어투를 사용한단 말이지. 이런저런 말들을 끌어모아 그중 몇몇을, 늘 같은 말들을, 아낌없이 쪼아대는 방식이 있고. 게다가 누구나 뇌 한구석에 광기의 씨앗 하나를 품고 있지. 그 도진 정도야 어떻든, 여리든 고착 상태든 말이야. 그 씨앗은 우리 살 속에서 싹을 틔워 핏줄과 신경을 타고 보이지 않는 덩굴처럼 기어가며 종내 마음과 생각 속에서 덤불이 되어 자라지. 우리 눈엔 그게 보이지 않아.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작은 싹들은 눈에 띄거든. 그래서 너도 눈을 다시 뜨고 타인을 보게 되는 거야. 바로 그거야.”
--- p.141
“아침 비를 두고, 덧없이 사라지는 고운 이슬인 여자들의 눈물만큼이나 빨리 마른다는 속담이 있죠.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남자들이 무얼 알죠? 우리의 회한과 두려움과 고통에 대해 정말이지 무얼 아냐고요. 스스로 울기를 금하는 그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서로의 마음에 감추어진 눈물에 대해 우린 또 무얼 아나요? 아무것도 모르죠! 경망한 죄인인 우리의 그림자 속에서 절뚝대는 천사들의 눈물에 대해서는 또 무얼 알고요? 아는 게 더 없어요! 아무도 모르는 고독 속에서 하느님이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라면 완전히 무지하고요. 기껏해야 침묵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거나, 심지어 무언증이라 책망하기도 하죠. (...)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종유석을 형성하는 눈물, 우리의 심장을 회오리처럼 휘어 감는 눈물, 우리의 꿈과 기억을 흐려놓는 눈물, 우리가 죽는 날 부서지는 눈물. 이 모든 눈물에서 봉헌의 소금이 분비됩니다. 죽는다는 건,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일종의 봉헌이니까요. 무(無)에 바치는 봉헌일까요,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일까요? 앞면인지 뒷면인지 내기를 걸어야 해요. 절충안도, 미온의 핑계도 있을 수 없어요. 전부 아니면 무(無)거든요. 내기를 걸고, 위험을 무릅써야 해요.”
--- p.154
그가 모든 걸 잊고, 소홀히 하고, 뒤죽박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한 줌 재가 되어 눈 속으로 녹아들어 간 야힘 브룸이 갑자기 그의 과거와 기억을 되살려 냈다. 그의 마음과 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바람 통하는 곳에 가져다 심어놓았다. 야힘 브룸, 이 땅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 사람, 무덤이라고는 질녀의 사랑 속에 새겨진 것이 전부인 그가 루드빅에게 다시 길을 떠나도록 재촉했다. 아무리 쓰고 떫다 해도 삶의 맛을 다시 찾으라고. 입에 쓰긴 해도 뜨겁게 타오르는 끈질긴 맛이었다. 야힘 브룸, 시간을 거슬러 영원을 향해 걸어간 사람, 의미를 찾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난 사람. 살아 있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무덤을, 새로운 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빈 무덤을 열고 나오는 사람. 야힘 브룸. 별거 아닌 선물과 한마디 말조차 확대시키고 고양시켜 복원해 내는, 아낌없이 베푸는 수취인.
---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