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적이 있는 여행지의 이야기를 막 다녀온 친구에게서 잔뜩 듣고 돌아와 ‘나도 다시 가볼까’ 하며 검색창에 도시의 이름을 적어보던 어느 밤처럼, 잊고 있던 시간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 내일을 그려보게 되는 책이 되었으면. 어제까지 떠날 일 없던 누군가가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는 어느 밤들을 그려본다. ---「프롤로그 '글쎄요, 역시 도쿄일까요'」중에서
한쪽에는 일러스트가 빼곡히 그려진 용도가 다양한 도장들이 종류별로 있어서 하나하나 눈으로 체크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작은 나무에 그려진 ‘참 잘했어요!’ 식의 도장들을 보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방금 눈에 보인 귀여움을 토해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귀여운 도장을 숙제 노트에 찍어주던 선생님은 없었지만, 왠지 그리워!
엉뚱하고 친숙한 일러스트가 담긴 문구들을 보니, 호텔에서 나설 때 돈을 얼마 가져왔는지 궁금해졌고 곧바로 지갑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귀엽기 때문에 쓸모 있는 것들은 분명 살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려고 여태 돈 벌고 살았던 거야. ---「귀여우니까 쓸모 있는 것들이 모여 있는 곳 [사브로]」중에서
역에서 내려 조금 걸었을 뿐인데 금방 도착했고 곧장 잠이 깼다. 밖에서 보기에 내부가 꽤 깊숙해 보였다. 슬쩍 문을 여니 근사한 서점이 나를 맞았다. 한눈에 느껴지는 좋은 분위기 덕분에 내 머릿속은 사사로운 생각들에 금방 휩싸였다. 하나, 나는 이곳을 쉽게 나가지 못할 것이다. 둘, 어느 책장을 봐도 관심 가는 것이 분명 몇 권씩 있을 테니 시간과 신경을 써서 자세히 보기로 하자. 셋, 아마도 돈을 많이 쓸 것이며 넷, 다음 일정은 생각하지 말자. ---「이곳만으로도 오늘 일정은 대만족 [테가미샤]」중에서
멜론 파르페는 하루 종일 걸어 지친 피로를 완벽히 씻어주었다.
첫입부터 끝 입까지의 모든 과정을 맛있도록 배분해놓은 맛. 보통의 세심함이 아니었다. 받침에는 멜론을 찍어 먹을 포크와 파르페를 즐길 수 있는 긴 찻숟가락이 놓여 있고, 파르페치고는 낮은 유리잔에 조각 멜론과 바닐라 아이스크림, 그리고 맨 위에는 구름 같은 생크림과 초록색의 포인트 풀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찬 메뉴이기 때문에 금방 물이 고일 것이므로 받침과 유리잔 사이에 깔려 있는 한 장의 휴지는 분명한 센스이다.
생크림과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떠먹다가 멜론을 잘라 함께 입에 넣는다. 이따금씩 포크를 이용해서 큰 멜론 덩어리를 입에 넣으며 찬 기운과 함께 당도를 느낀다. 아이스크림 밑에는 한 번 더 생크림이 존재하고, 유리잔 바닥이 보이기 직전에는 마지막 멜론 조각과 함께 옐로우 멜론 셔벗의 등장. 맨 밑이 왜 붉은가 했더니 옐로우 멜론 셔벗이었다. 한 방 먹었다. 그 덕에 멜론 고유의 힘을 유지하며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진행시킨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어도 첫맛의 진함을 유지하기란 어려운데, 같지만 조금 다른 당도들이 순서에 맞게 입에 들어오니 감탄 또한 쉴 틈이 없다.
먹는 사람의 시간을 상상하며 만든 게 분명해.
‘내가 먹는다면 이렇게 먹어야 행복할 거야’라는 만든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다. ---「노면전차를 타고 멜론 파르페 [아사히야 파라]」중에서
설명해드릴게요. 활활 끓는 기름에 생계란을 톡 까서 넣고 껍질은 뒤로 던져버려요. 그 사이에 뜨거운 기름 안에서 어쩔 줄 모르는 흰자와 노른자가 놀라지 않도록 긴 젓가락에 반죽 물을 묻혀서 파르르 파르르 떨구며 계란에 옷을 입혀주며 튀기는 방식이지요. 기술을 요하는 튀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파르르 파르르. 그러면 기름 안에서 노른자를 품은 흰자가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듯이 반죽 옷을 잡아끌며 입게 됩니다. 그렇게 기름 안에서 만난 생계란과 반죽은 과하지 않게 꽤 멋스러운 모습으로 튀겨집니다. 이렇게 완성된 계란 튀김을 미리 그릇에 담아둔 흰밥에 올리고 특제 간장 소스를 부어 주기만 하면 끝!
(중략)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 즐겁네요.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럴 때는 이상하게 자신만만해져서 신나게 떠들고 싶어집니다. 왜 맛있는지, 어떻게 맛있음이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의견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인가 봅니다. ---「한 사람을 위한 계란 튀김 쇼 [텐스케]」중에서
하루의 페이지 끝을 접어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그런 날 혹은 최악의 날들이 반복되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날은 분명히 있으니, 되도록이면 좋은 날을 굳이 표시해서라도 붙들고 싶다.
아, 내 인생의 경우라면 저마다의 이유들로 모든 페이지가 접혀 있을지도 모른다. 빵이 부쩍 맛있게 느껴져서 접어두거나, 지나다 본 길냥이의 다리에 엉뚱하게 박혀 있는 무늬에 마음이 동요해 접어두거나, 평소보다 늦게까지 열려 있던 동네 호떡집 덕분에 맛볼 수 있던 녹은 흑설탕 맛에 접어두거나.
여행의 나날에서도 부쩍 접어두고 싶은 페이지 같은 하루가 있다. 매 순간이 특별해야 할 것 같지만 막상 그렇지 않은 매일이 반복되는 여행의 하루에서 결국 마음이 꾹 눌리고야 마는 건 아주 사소한 일이다. 쉬러 들어간 커피 체인점의 비엔나커피가 의외로 맛있거나, 지나는 길에 우연히 본 귀여운 간판에 웃음이 나거나, 숙소 앞에 늦게까지 열려 있던 조각 케이크 집에서 딸기를 얹은 케이크와 몽블랑을 사며 나만이 아는 웃음을 짓고는 한다. ---「삶에 힌트를 주는 책장 [팡야노홍야]」중에서
전시 소식을 나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접한 킷사 퍼블리크 팔러 SAMPO의 점주분께서 부러 전시를 보기 위해 서니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이런 후기를 남겨주었다.
이전에 카페에 내점했을 때, 기회가 있다면 꼭 작품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씨의 개인전에.
진아 씨의 언어와 일러스트는, 마치 통풍이 잘되는 곳에 몸을 두고 있는 것 같아서 참으로 상쾌해집니다.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다가 그림이 액자 안에 담기고, 그 액자가 창문이 되어서 어떤 기운을 전하고 전해 받는다는 것.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처럼 혹은 장난 같은 마법처럼, 도쿄의 작은 마을에 작은 비밀의 문이 창문처럼 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발을 담그고 싶은 비밀의 문.
전시를 보는 사람과 책을 넘기는 사람이 잠시나마 작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시간을 선명히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그런 시간을 가진 것이니, 정말 기뻤다. 통풍이 잘되는 곳에 몸을 두고 있다는 표현을 어찌 할 수 있었을까. 과연 명언의 나라, 후기의 나라라는 생각을 지나며 강한 감동을 받았다. 분명, 일상에서 때때로 그런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이 아닐까. 아, 정말 좋은 일상이 아닐 수 없다.
실은 스트레칭 전시는, 나에게 유연함을 주었다. 결국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를 손수 만든 셈이었다.
---「도쿄에서의 첫 전시 다시, [서니 보이 북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