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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9
작품해설 178 작가의 말 192 |
저안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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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수미를 전수미라 부른다. 종종 수미년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미년이 또 사고를 쳤구나. 그런 대사를 늘 입 안에 담고 지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전수미 때문에 달력 뒷면에 인쇄된 그림처럼 살았다. 백지로 남겨두기 뭣해서 인쇄는 했지 만 1년이 다 가도록 누구 하나 뒤집어보지 않는 뒷면 그림 말이다. 달력을 버리기 직전에나 성의 없이 넘겨보다 이내 덮어버리게 되는 조악한 것. 그럼에도 1월에는 해돋이를, 3월에는 벚꽃을, 9월에 는 보름달을 채워 넣는 악착같은 마음으로 나는 살았다.
--- pp.9-10 엄마도 도망가고 싶어. 아빠도 머리가 너무 아프다. 지금은 언니가 큰일이잖니. 오늘 하굣길에 언니가 자전거를 다섯 대나 부쉈다는 얘기 들었지? 경찰서에 학교에 수리점까지 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우선 언니부터 해결하고 너는 조금만 뒤에. 우리 수영이는 똑똑하니까 아빠 말 이해하지? 엄마가 믿을 사람은 수영이 너뿐이야. 알지? --- p.27 돌이켜보면 전수미는 자신을 해치는 일만큼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수치와 모욕을 견디는 건 항상 주변인들이었고, 평안을 구걸하는 것도 항상 주변인의 몫이었다. 멋대로 사람을 휘둘러 지배력을 확인하는 것,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것. 전수미는 엄마 아빠의 불안을 양분 삼아 하루가 다르게 전능해진 셈이었다. --- p.32 “저 쿠팡 물류센터에서 3년 일했어요. 인내심, 끈기, 체력, 정신력, 다 자신 있습니다.” “그런데 왜 3년만 했어요?” “어깨 인대가 끊어져서 잘렸어요.” 물류센터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그랬다. 여긴 지옥이지만 여기서 버텼다는 건 굉장한 이력이 될 거라고. 어디 가서 일하든 쿠팡에서 견뎠다는 말만 하면 돼. 인대가 끊어졌어도 산재 처리 안 받았다고,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 한 번도 결근하지 않고 매일 그 자리에서 일만 했다고 말해. 전부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그들의 말대로 했다. 말하면서 잠깐 의아해지기는 했다. 그토록 완벽한 지옥을 견뎌냈다고 말해야 채용될 수 있는 곳이라면 이곳도 그에 못지않은 지옥인 거 아닐까. --- pp.45-46 개들은 모두 조용하고 안전하게 죽는다. 사랑하는 주인의 품에서, 대부분 금요일 밤에. 왜 궁금해하지 않을까. 이곳의 개들이 왜 금요일에 많이 죽는지. 사실은 여러 요일이 있다. 자영업자의 개는 월요일에, 회사원의 개는 금요일에, 프리랜서의 개는 수요일과 목요일 한낮에 죽는다. 그것을 나는 안다. 소란도 알고 야간근무하는 하림도 알 것이다. 수의사가 상주하는 돌봄센터니 더없이 명확한 치료와 돌봄이 이루어지겠지. 사실이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한다. 하지만 보호자들은 진짜로 모르는 걸까. 개들을 치료하는 것도 개들을 안락사시키는 것도 모두 수의사의 일이다. --- pp.53-54 처음엔 다들 저렇다. 애틋해하고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고 당장이라도 개를 끌어안고 도망칠 것처럼 여지를 남긴 채 머뭇거린다. 그러다 곧 멀어지고 둔감해지고 뜸해지고 어디에도 발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보호자들은 기계적으로 홈캠을 돌려보며 우리에게 따진다. 제대로 케어하고 있는 거 맞아요? 왜 우리 개만 이렇게 우울해 보여요? 개가 우울해하지 않도록 자주 면회를 와달라 부탁하면 더 큰소리를 낸다.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으니 거금을 들여 센터에 맡기는 거잖아요. 내 삶이 얼마나 고된지 알기나 해요?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당신이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 기껏해야 개 똥오줌이나 치우고 있는 주제에. --- pp.74-75 나는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고 제일 먼저 무시당하고 항상 크게 다쳤다. 급여의 상당 부분을 떼어먹히고 손쉽게 교체당했다. 그래도 나는 매일같이 노력했다. 전수미와 살면서 유일하게 배운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3월에는 벚꽃을 9월에는 보름달을 12월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려 넣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살았다. 악착같이 버티는 사람이 제일 참담하게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 p.117 반려동물도 가족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같잖은 소리라고 생각해요. 의사결정권도 선택권도 권리행사능력도 없는 게 무슨 가족인가요. 개들이 짖거나 물건을 부수면 인간들은 아무렇지 않게 개를 내다 버립니다. 개가 이웃을 물기라도 하면 세상 합당한 이유를 찾았다는 듯 안락사시켜요. 그저 시간이 흘러 개가 늙었을 뿐인 데도 인간들은 억울해합니다. 개한테서 악취가 난다고, 털이 빠지고 피부병이 생겨 흉측해졌다고, 돈이 많이 든다고 화를 내요. 세상에 그런 가족이 어딨습니까.” --- p.127 끝까지 비겁하구나, 나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상상에서조차 뒤로 물러서 있다. 보호자가 알아서 진실을 캐내기를, 직접 나를 응징하러 이곳까지 오기를 다만 기다리고 있다. 구 원장에게 했던 거짓말이 떠올라 얼굴이 뜨거워진다. 나는 고작 이 정도의 인간이니 또 그런 짓을 할지 모른다. 구 원장에게 했던 것처럼, 나를 찾아온 보호자에게 뻔뻔한 얼굴을 하고 또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제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 거울을 보면 그 안에 있는 건 나일까 전수미일까. 몸속이 소리 없이 일렁인다. 더듬이들이 진저리치듯 떨고 있다. --- p.157 잘나가던 업체가 갑자기 망하는 건 으레 그런 이유다. 반윤리적인 행위와 내부 고발. 나는 구 원장의 돌봄센터가 망하길 바란다. 그러니 기꺼이 내부 고발자가 될 것이다. 나는 전수미가 자신이 저지른 만큼의, 꼭 그만큼의 형량을 받길 바란다. 그러니 기꺼이 가족 고발자가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는 나 자신의 고발자도 되어야 한다. 태풍이의 병증을 내가 어떤 식으로 외면했는지, 더 나아가 그날 자작나무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자가 내게 했던 일과 내가 남자에게 했던 일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전부 설명해야 할 것이다. --- pp.183-184 |
세상 모든 곳의 ‘전수영’들에게 보내는 헌사
‘전수미’의 그림자 속에서도 꿋꿋하게 허리를 펴고 자라난 세상 어느 곳의 ‘전수영’들은 또 다시 악착같이 나타날 것이고 어떻게든 고발을 이어갈 것이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뒤틀린 세상 속엔 이미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탓에 지금 이곳의 고발자는 곧 자신의 치부까지도 들춰낼 결단을 동반한 “나 자신의 고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 최소한 “전수미가 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살아왔”던 ‘나’의 끈덕진 고집처럼 누군가의 오기와 진심은 다른 이의 용기가 되어 바깥으로 조금씩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선과 악에 대한, 불가해한 악의와 위험한 매혹으로 똘똘 뭉친 ‘전수미’에 대한 서사가 아니다. “고작 이 정도의 인간”, 한참을 고뇌하고 방황한 뒤에야 가까스로 최소한의 인간을 지켜낸 세상 모든 곳의 ‘전수영’들에게 헌사된 이야기이다. ―조대한, 「작품해설」 중에서 작가의 말 무덤이나 납골당에 무기한 수납되고 싶지 않다. 3년쯤 지나면 추모 팻말을 뽑아버리는 수목장은 없을까. 죽음 이후 아무것도 갱신할 필요가 없는 곳. 그런 곳을 찾아달라고 하면 나의 언니는 서운해하고 많이 울고 내게 너무한다고 욕을 하다 끝내는 찾아줄 것이다.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가 주변에 있으신가요? 네, 있어요. 틀림없이 있어요. 그러시군요. 그것 참 다행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