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프롤로그
빛과 어둠을 그린 위험한 천재 ― 당신이 알지 못했던 카라바조 제1장 1571~1592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밟다 ― 죽음을 마주했던 어린 시절 제2장 1592~1595 혼자 힘으로 다시 일어서다 ― 로마에서의 초기 생활 〈과일 깎는 소년〉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병든 바쿠스〉 〈바쿠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카드놀이 사기꾼들〉 〈점쟁이〉 제3장 1595~1599 뒷골목에서 대저택으로 들어가다 ― 강력한 후원자와의 만남 〈류트 연주자〉 〈황홀경에 빠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과일 바구니〉 〈나르키소스〉 〈메두사〉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와 막달라 마리아〉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제4장 1599~1602 작은 캔버스에서 대형 제단화로 ― 성당 제단화 화가로의 데뷔 〈성 마태오의 소명〉 〈성 마태오의 순교〉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첫 번째 버전 제5장 1602~1606 화가로서 첫 번째 위기를 맞다 ― 제단화 거절 후 그린 작품들 〈성 마태오의 영감〉 〈성 마태오와 천사〉 〈성 바울의 회심〉 두 번째 버전 〈승리자 아모르〉 〈의심하는 도마〉 〈그리스도의 체포〉 〈이삭의 제사〉 〈이 사람을 보라〉 〈성모의 죽음〉 제6장 1606~1608 그림 속 칼을 실제 빼 들다 ― 초기 도피 생활 중 그린 작품들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두 번째 버전 〈일곱 가지의 자비로운 행동〉 〈성 세바스찬〉 〈명상하는 성 프란치스코〉 〈성 아가피투스(산 젠나로)의 참수〉 〈성 세례 요한의 참수〉 〈알로프 드 위냐쿠르와 시종의 초상〉 제7장 1608~1610 자신을 겨눈 칼에 다짐을 새기다 ―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작품들 〈나사로의 부활〉 〈이 뽑는 사람〉 〈세례 요한〉 〈막달라 마리아의 황홀경〉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성 우르술라의 순교〉 에필로그 마지막 행적을 둘러싼 미스터리 ―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카라바조 카라바조의 생애 |
저김선현
관심작가 알림신청金善賢
김선현의 다른 상품
르네상스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바로크는 감정의 시대였어요. 그리고 그 맨 앞에 카라바조가 있었습니다.
---「프롤로그」중에서 카라바조는 테네브리즘이라는 명암법을 사용했어요. 어둠, 그림자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테네브라(tenebra)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극적 효과를 연출하는 기법이에요. 그의 작품이 빛과 어둠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죠. ---「프롤로그」중에서 카라바조는 성경이나 신화 속 인물들을 이상화하지 않았어요. 대신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현실감 있게 표현했죠. 그래서 감상자는 마치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인물들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프롤로그」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이어 겪은 가족의 죽음은 카라바조의 내면에 큰 그림자를 드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음의 실체를 몸소 마주한 그는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제1장 1571~1592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밟다」중에서 신을 그릴 때도 신성함만을 강조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냈죠. 카라바조에게 캔버스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소통의 창구였던 거예요. 결국 예술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자 했던 거죠. ---「제2장 1592~1595 혼자 힘으로 다시 일어서다」중에서 화가가 어떤 심정으로 그렸는지를 당시 상황을 미뤄 짐작해 보는 거죠. 화가의 감정은 작품 속 인물과 동일할 수도, 아니면 아예 반대일 수도 있어요. 당시 카라바조는 (…) 미래에 대한 부푼 꿈으로 한없는 설렘을 느끼고 있었죠. 우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할 때 긴장감과 함께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죠. 심리학적으로 설렘이라는 감정은 스트레스를 직접적으로 줄여주는 강력한 작용을 합니다. ---「제2장 1592~1595 혼자 힘으로 다시 일어서다」중에서 델 몬테 추기경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카라바조도 한편으로는 불안했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환대를 받지만 언젠가는 외면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그를 자주 괴롭히지 않았을까요? (…) 경쟁이 치열했던 로마에서 카라바조가 정말 경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동료 화가보다 마음속에 피어나고 있던 자만심을 더 경계했을지도 몰라요. ---「제3장 1595~1599 뒷골목에서 대저택으로 들어가다」중에서 델 몬테 추기경의 보호 아래 재능을 마음껏 펼치던 카라바조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제안을 받아요. 바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과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으로부터 대형 제단화를 의뢰받은 거죠. (…) 카라바조는 결국 해내고 맙니다. 그리고 로마 최고의 화가로 우뚝 서죠. ---「제4장 1599~1602 작은 캔버스에서 대형 제단화로」중에서 제단화가 연이어 심사에서 탈락하며 그는 깊이 상심했고, 자신을 불신한 세상을 원망하며 크게 좌절했어요. 삶이 곧 작품이었던 그에게 작품에 대한 비판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느낌이었을 거예요. 최고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은 카라바조는 이때부터 여러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다녀요. ---「제5장 1602~1606 화가로서 첫 번째 위기를 맞다」중에서 어린 나이에 보호막이 되어줘야 할 가족을 잃고 혼자의 몸으로 밀라노와 로마로 건너온 그에게 그림은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어요. 그리고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것처럼 강해졌다고 느꼈을 거고요. 하지만 앞선 제단화 거부의 잔상이 가시기도 전에 또 한 번 위기를 겪자, 마음속 트라우마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해요. 카라바조는 불안할수록 더욱 파괴적으로 변했죠. 그리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제5장 1602~1606 화가로서 첫 번째 위기를 맞다」중에서 1606년 5월 28일, 이윽고 카라바조의 운명을 바꾼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다녔지만, 이번에는 달랐죠. 그는 결국 가지고 다니던 칼로 사람을 찌르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제6장 1606~1608 그림 속 칼을 실제 빼 들다」중에서 사실상 카라바조의 주위에는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어른이 없었어요. 잘못에 대해 따끔하게 혼을 내고, 위로가 필요할 때는 감싸 안아줄 진정한 멘토가 아예 없었죠.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도요. ---「제6장 1606~1608 그림 속 칼을 실제 빼 들다」중에서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은 카라바조의 심정을 대변해 주듯 강력한 어둠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자화상을 넣은 작품도 여럿 남아 있죠. 초창기 바쿠스를 자신의 얼굴로 표현하던 그는 이제 잘린 목에 스스로의 얼굴을 그려 넣기 시작합니다. ---「제7장 1608~1610 자신을 겨눈 칼에 다짐을 새기다」중에서 누구든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실수를 했을 때, 잘못된 선택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상황을 되돌리려 하죠.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인간은 후회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카라바조 또한 처절한 후회와 성찰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7장 1608~1610 자신을 겨눈 칼에 다짐을 새기다」중에서 우리는 흔히 작가의 일생과 작품에 대한 평가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더욱 그렇죠. 성공 신화에 매몰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예술가는 삶의 패배자이고, 그의 작품 또한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에필로그」중에서 비록 카라바조도, 그의 마지막 작품도 사라졌지만 그는 예술사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 카라바조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그를 따르는 세계적인 유파인 ‘카라바제스키(Caravageschi)’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잘 알려진 젠틸레스키, 조르주 드 라 투르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죠.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루벤스, 렘브란트 모두 카라바조가 다져놓은 예술 위에 서 있습니다. ---「에필로그」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