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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 탁월한 삶을 위하여
1부 살며 교토와 서울의 집 자전거로 일상을 달린다 공간의 권력-자전거 공간 노래와 나 집으로 숨어 있는 마을 겸손한 담 길, 겸손과 인내의 표정 말하라, 기억이여 등산, 신성을 깨다는 경험 팬과 프로팬 2부 여행하며 카이로는 아프리카 푸에블라의 웃음 우르비노의 추억 파리 산문 3부 공부하고 콜테스의 칠흑 같은 희곡 움직이는 의자 춤 봄과 음악 책의 운명 은자들의 삶 또 하나의 세상, 건축 사진과 시간 맺으며 / 나는 어디에 있는가 |
저안치운
자전거 타기의 매력은 많다.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장소에 대한 호기심과 삶의 열정을 다시 배우게 된다. (…) 이 책에도 “앞서 일상을 여행하자”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 표현이 참 좋다. 신이 날 정도이다. (…) 파리에서 돌아오자마자,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손보았다. 체인을 갈고, 기름칠을 하고, 때도 벗겨내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파리에 있는 동안 자전거를 타는 이들을 볼 때마다, 타고 싶다는 욕망이 출렁거렸다. --- p.37, 「자전거로 일상을 달린다」에서
〈현악5중주〉는 슈베르트의 유언이었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를 위한 야상곡’으로 알려진 〈아다지오〉는 그의 유작이다. 눈물겹도록, 아니 눈물이 소리로 미끄러져 비상하는 비가悲歌이자 들을수록 눈물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걸작이다. (…) 나는 이 음악을 귀로 들으면서 허리가 아픈 것을 잊게 되었고,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에 크게 감동했다. 그의 음악은 삶과 죽음에 대한 헌사와 같다. --- pp.48~49, 「노래와 나」에서 ‘만남의 장’인 극장이란 곧 타인의 삶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공간이다.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은 장르가 달라도 배우는 우선 ‘나’를 말한다. 공연은 제 삶을 말하기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말해야 하는 작가들은 힘들게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그것을 글로 옮겨야 하고, 용기 있게 말할 장소를 만들어야 하고, 지금 여기에 공연으로 실행해야 한다. --- pp.85~86, 「말하라, 기억이여」에서 철저히 혼자 있는 나는 몇 가지 도구와 함께 있다. 책과 컴퓨터 그리고 프린터. 나는 그것들과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혼자 있을 때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있다는 것을 남기기 위하여 글을 쓰는 일이다. 글 쓰는 일은 이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사무엘 베케트가 죽는 날까지 하얀 벽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면서 지냈던 것처럼 말이다. --- pp.121~122, 「파리 산문」에서 “(…) 더 이상 못 참겠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라고 이어지는 말은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배고픈 개처럼 크게 울부짖는 말 속에 인물들이 겪는 고독과 위험이 묻어 있다. 무엇 때문일까? 언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과잉된 말들을 인물들이 말한다 하더라도 그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만이 본질이라고 전하는 것 같다. (…) 폭력, 가난함, 인종차별,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말하는 그의 희곡을 읽고 나면, 읽으면서 나간 길을 되돌아오게 된다. 돌쩌귀에 끼워져 있던 인물들이, 세상이 본디 모습을 되찾는 것 같다. --- pp.199~200, 「콜테스의 칠흑 같은 희곡」에서 |
산문의 힘,
가장 일상적인 것들을 소재로 끝까지 밀어붙인 사유 연극에 관한 촘촘한 비평서를 통해 글 잘 쓰는 연극평론가로 알려진 안치운의 산문집이 출간됐다. 사실 그는 연극계에서 다소 이례적인 존재다. 시인 김정환이 어느 글(〈프레시안〉 2005년 7월 29일자 기사 「육체의 응집인 정신과 정신의 해방인 육체의 변증법―연극인 안치운」)에서 지적했듯,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연극을 공부하고 귀국했으나 한국 연극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그가 쓴 비평 글들은 연극 동네보다는 그나마 연극과 제일 가까웠던 문예지 〈문학과사회〉, 〈창작과비평〉 등에 실렸고, 적지 않은 그의 저서 또한 유명 문학 출판사에서 그 문학성을 인정받아 출간되었다. 우리 옛길의 아름다움을 되짚어본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에도 시적 서정의 극치라 할 만한 문장들이 살아 있다. 안치운은 연극이든 길이든, 글을 통해 대상의 본질로 육박해 들어가고자 하며 이런 태도는 『시냇물에 책이 있다』에도 관철된다. 이 책에는 길, 자전거, 집, 술집, 노래, 책 등 가장 일상적인 것들을 소재로 한 저자의 철학이 조용히 타오른다. 그 핵심은 자신을 둘러싼 자리에 날을 세우면서도 지향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자유정신이다. 그에게 물질 중심, 속도 중심의 우리 삶은 절대 행복할 수 없는 것이며, 제대로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찰하는 태도뿐이다. 특히 저자가 고졸한 문장으로 묘사한 ‘자연’과 ‘예술’은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도구다. 감각이 사유를 앞서는 책들이 넘쳐나 산문 문학의 전통이 흐트러지는 요즘, 안치운은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산문의 힘을 보여준다. 걷는 일은 내게 세상과 삶을 다시 연역할 수 있는 계기였다. 배워서 걸은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많은 것을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걸은 적이 있는 길을 다시 걷더라도 부질없다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걸으면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유는 근원적인 방향으로 향한다. 눈에 보이는 것, 발아래 밟히는 것,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본질로 와 닿는다. --- p.77, 「길, 겸손과 인내의 표정」에서 자연과 예술이 희망이다 한 지식인의 생생한 감동 이 책은 크게 ‘살며, 여행하며, 공부하고’라는 주제로 분류하였다. 1부 「살며」에서는 집, 자전거, 담 등 일상을 함께하는 대상들을, 2부 「여행하며」에서는 카이로, 푸에블라 등 낯선 공간과의 만남을, 3부 「공부하고」에서는 희곡, 춤 등 예술을 통찰한다. 여기서 굳이 ‘통찰’이라는 큰 말을 쓴 것은 눈에 닿는 것마다 개인적인 감상에만 침잠하지 않고, 현실을 한데 바라보는 긴장 어린 시선 덕분이다. “사회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관점 이상의 쟁점”이라는 장정일의 언급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이를테면 그는 교토의 집들이 풍기는 고요한 분위기에 젖어들면서도, 삶의 질보다 집의 크기와 값에 대해서만 저울질하는 우리네 삶의 부박함을 지적한다. 또 파리에서 무인 공공임대 자전거에 감동하면서도 속도가 패권을 차지한 서울의 자전거 타기의 위험에 절망한다. 무엇보다 그의 통찰을 빛나게 하는 것은 절망과 반성으로 가득한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 부분이다. 2부 마지막 글 「파리 산문」은 암울했던 시기, 유학생으로 지내며 ‘연극하는 자’로서 실존을 묻는 농밀한 글이다. 이 글에서 개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시대를 견디는 자의 초상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나의 몸과 마음이 늘 피로한 것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현재와, 꿈꾸지 못했던 과거, 그 억압된 과거가 주는 힘겨운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자유와 상상력은 이 나라에 도착했다고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문제는 자유로운 말들의 상상력이 내게는 쉽게 이행되지 않는 점이다. 오래전 처음으로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는 이런 문제에 아주 힘겨워했다.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그렇다. (…) 용감한 사람들과 자유로운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의 교제는 어찌 그리 힘들고 어려운가? --- p.193, 「파리 산문」에서 앞서 언급했듯 저자에게 이런 ‘힘겨움’을 극복할 희망은 ‘자연’과 ‘예술’이다. 이 책에는 그가 자연과 가까워지기까지 ‘나는 왜 자연에 이끌렸는가?’ ‘자연은 무엇을 가르쳤는가?’ ‘자연과 연극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에 대한 문답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그저 도피처였으나 큰 위안이자 윤리 그 자체로 자리매김한 과정이 사뭇 저릿하다. 또 예술은 또 다른 삶을 지시하는 경전이기에 저자는 감동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희곡이며 노래며 사진에 대한 예찬이 뒤따른다. 그것은 정갈한 삶을 바라는 지식인의 생생한 감동이다. 암벽등반은 본질적으로 통제되고, 질서정연한 몸 전체의 움직임으로 오는 평화스러운 모험이다. ?위를 수직으로 오르는 춤이다. 스마이드는 암벽등반을 하면서 “어느 언덕에서 햇빛을 받으며 산들이 침묵으로 노래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도 좋은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는 시간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암벽등반은 매우 탐미적인 행위이다. --- p.91, 「등산, 신성을 깨닫는 경험」에서 “삶을 탁월하게 소유하기 위하여, 좋아하는 글을 더 즐기기 위하여 공부하고 글 쓰는 일이 내게 남았다” 안치운은 어느 인터뷰(〈중앙선데이〉 2008년 2월 4일자 기사 「장정일이 만난 작가―연극평론가 안치운」)에서 “연극이여, 이제부터 철학을 주문처럼 외우자. 삶과 연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 그것이 한국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이 살아남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에 ‘연극’ 대신 ‘삶’을 넣어보면 어떨까. ‘삶이여, 이제부터 철학을 주문처럼 외우자.’ 그것이 저자가 삶을 탁월하게 소유하는 방식일 것이고, 우리는 그 길 가운데 계속될 글쓰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글은 피로 쓰여졌다고, 글이란 모름지기 피로 써야만 한다고 니체는 말했다. 비록 나는 흡혈귀가 아니지만, 진정 피로 쓴 책들을 좋아한다. 그런 저자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지만, 특히 연극평론가 안치운 선생의 책들을 좋아한다. --- 장정일, 「장정일이 만난 작가―연극평론가 안치운」(〈중앙선데이〉 2008년 2월 4일자 기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