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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김명인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k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姓을 받아 비로소 李가라던가 金가라던가 朴가면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내 귀갓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이 强辯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 채점표 밖에서 얼마만큼의 거짓으로나 매겨지는지 몸을 던져 세상 끝끝까지 웅크리고 가며 외롭기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고 그래서 더욱 괴로운 너의 모습 너의 말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 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東豆川 4」 전문 |
김명인의 시간과 길, 그리고 詩
김명인 시인은 시를 향했던 원초적인 그리움이 자신의 태생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시인의 고향은 영동.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과 그 안의 척박한 살림살이, 그리고 유년시절 배고픔을 통해 일깨워진 본능적인 감각과 매일같이 마주해야 했던 그래서 너무도 벗어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찼던 동해는 시인의 태생과 성장기의 아픈 흔적들이자 그가 시를 쓰기 이전부터 문학적 자양이 되어주었던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집안 형편으로 한때 아예 대학진학을 포기하기도 했던 시절과 동두천에서의 교사 생활, 그 후 월남 전쟁 참전까지, 그의 지난 세월은 「東豆川」 「嶺東行脚」 「베트남」 연작으로 고스란히 시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시가 갖는 울림이 더욱 큰 것일는지 모른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진 김명인 시인에 대한 문단 안팎의 관심은, 새로운 시집이 나올 때마다 이어지는 호평으로도 잘 알 수가 있다. 1973년에 등단한 이후 6년 만에 나온 첫 시집 『東豆川』은 현실의 상처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시편들로 80년대의 시작과 함께 독자와 평단에 충격과 반가움을 안겨주었다. 이후 두번째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가 나오기까지는 9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는데, 그 이유는 시인이 밝히고 있듯이 “실존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이 내지른 절규”였던 『東豆川』을 상자한 후, 이 시집의 주제이기도 했던 “펼쳐야 할 사랑과 접히는 마음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차라리 시를 포기할까 고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영영 시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으로” 『머나먼 곳 스와니』를 상자하고, 1년간 객원교수로 미국생활을 했다. 그러고 나서 나온 세번째 시집 『물 건너는 사람』부터는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길을 찾으려는 사색과 응시의 자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인의 자세는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를 거쳐 『길의 침묵』에 이르면서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그를 ‘길의 시인’으로 부르게 된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러한 그의 시를 일컬어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강인한 서정”이라 평하며 “그 강인함의 비밀은 인간 심상의 위대함에 대한 믿음, 곧 문학에 대한 믿음”이라 설명한다. 또한 문학평론가 이숭원의 말을 빌리면 김명인 시인은 “막막하고 어두운 생의 지평을 넘어서려 하면서도 결국은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사슬에 힘겨워하며, 유적과도 같고 몽유와도 같은 현실 속을 끝없이 헤”매고 있으며, “그 몽유의 흔적은 사원에 내장되어 있는 낡은 경전처럼, 혹은 순례자의 고통을 담은 유적처럼, 뒤에 오는 고행승들에게 반려와 이정표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그의 시는 고통과 상처를 노래함으로써 역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독특한 기능을 수행”한다. 김명인의 시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시간’이다. 이것은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잘 드러난다.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김명인이 보여주는 실존적 사색의 중심에는 시간이 놓여 있다”고 보고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시간의 유한성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어둡고 쓸쓸한 내면 의식”이 이 시집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파문』은 삶의 허무와 상처를 감지하게 하는 세상과 우주의 시간이자 신호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듯 시가 되어 우리에게 드러난 시인의 시간과 길. 『따뜻한 적막』으로의 여행은 이 가을, 우리를 더욱 깊어지게 할 듯하다. 시인 박라연은 김명인에 대해 “생의 남루를 서늘한 미학으로 바꾸어놓는 데 천재인 것 같다”고 평하며, 그 힘을 “좋은 시는 핍진한 생의 현실에서 나오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따뜻한 시선”이라는 말로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은 고단한 생의 기억을 애정과 아쉬움이 담긴 글썽이는 눈길로 망연히 응시하는 이번 시선집의 표제작 「따뜻한 적막」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자신의 시간이자 길이었던 시를 글썽이는 눈으로 되돌아보는 시인의 시선을 가만히 좇다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