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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
수필 언덕방은 내 방 서신 이해인 수녀님과의 손 편지 작품 해설 통곡과 말씀의 힘 ― 황도경(문학평론가) 개정판에 부치며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 호원숙(작가) |
朴婉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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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여름, 아들을 잃었습니다. 다섯 자식 중에 하나였지만 아들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pp.9~12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줬지만 88올림픽이 여전히 열리리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걸 어찌 견디랴. 아아, 만일 내가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p.18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상대방을 볼 때는 그 자리에서 당장 꺼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생각해 낸 말이 잊으라는 소리다.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잊으라는지. 세월이 약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격렬한 반감이 솟구칠 때도 없다. ---pp.18~19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사랑 그 자체란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금 맹렬한 포악이 치밀었다. ---p.36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순간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기회는 당장 발밑에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는 걸 안다. 또한 그것만이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내 나름의 경신(敬神)의 한 방법이다. ---p.38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이렇게 해서 차츰 먹고 살게 되려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반발이 치밀었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를 생각하니 징그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격렬한 토악질이 치밀어 아침에 먹은 걸 깨끗이 토해냈다. ---p.43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내 아들의 죽음의 의미는 뭘까? 죽음 후에도 만남이 있을까? 그 애의 죽음은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신이 있기나 있는 것일까? 인간의 기도나 선행과는 상관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한 치 앞도 못 내다보게 눈을 가려놓고 그 운명을 마음대로 희롱하는 신이라면 있으나마나가 아닐까? ---pp.69~70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그 애를 잃고 나서 아직 고기를 입에 넣은 적이 없다. 소화가 안 된다는 핑계였지만, 그 애가 죽던 날 밤,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유난히 맛있게 등심구이를 아귀아귀 먹은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쳐져서 생전 고기를 먹을 것 같지가 않다. 집에서처럼 따로 눌은밥을 좀 끓여달래서 먹었지만 누린내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p.87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먼저 데려가신다는, 예수쟁이들의 상투적인 위로는 딱 질색이었다. 내 아들은 물론 의인도 아니었지만, 만약 그런 소리를 조금이라도 믿어야 한다면 세상의 어느 에미가 자식에게 정의나 도덕을 가르칠 수가 있단 말인가. ---p.98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그래, 나는 주님과 한번 맞붙어 보려고 이곳에 이끌렸고, 혼자돼 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애걸해서 안 되면 따지고 덤비고 쥐어뜯고 사생결단을 하리라. ---p.104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p.127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나는 그 정답에 머리 숙여 승복했다. (…) 구원이었다. 고통도 나눌 가치가 있는 거라면 나누리라. ---p.144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참척을 겪은 기막힌 애통과 절망은 당연히 에미의 목숨을 단축시킬 줄 알았다. 살고 싶지 않은 게 조금도 거짓이 아닌 이상 육신은 의당 거기 따라주려니 했다. 그러나 내 육신은 내 마음과는 별개의 남처럼 끼니때마다 먹고 살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육신에 대해 하염없는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p.155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병들거나 다친 짐승은 누가 가르쳐준 바 없이도 그에게 맞는 약초를 가까운 데서 찾아낸다고 한다. 나 또한 내 속에 잠재된 짐승처럼 질기고 파렴치한 생명력이, 죽고만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염치를 거역하고 살길을 냄새 맡고 수녀원 쪽으로 강력하게 이끌린 게 아니었을까. ---pp.155~156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다시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은 내가 내 아들이 없는 세상이지만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증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안다. 내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가 있다니, 부끄럽지만 구태여 숨기지는 않겠다. ---p.172 「일기_ 한 말씀만 하소서」중에서 수녀원의 언덕방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6년이 된다. 내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1988년 가을이었으니까. (…) 마침 그때 이해인 수녀님으로부터 수녀원에 편히 쉴 만한 방이 있으니 언제라도 오라는 고마운 말씀을 들었다. (…) 결국 나는 언덕방 손님 노릇을 통해 세 살짜리 같은 응석받이로부터 홀로서기에 성공을 할 수가 있었다. 그 후에도 거의 해마다 수녀원 언덕방의 손님 노릇을 다만 며칠이라도 하고 와야 마음이 개운해지는 버릇이 생겼다. ---pp.177~179 「수필_ 언덕방은 내 방」중에서 제가 수녀님을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나 되었나 새삼스럽게 꼽아보니 어쩔 수 없이 그 힘들었던 88년이 기점이 되는군요. 88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 소리가 나올 적이 있을 만큼 아직도 생생하고 예리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가까이 계시어 분도수녀원으로 저를 인도해 주신 것은 그래도 살아보라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p.183 「서신_ 이해인 수녀님과의 손 편지」중에서 |
자식 잃은 참척의 고통과 슬픔, 그 절절한 내면 일기
“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입니다.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닌 극한 상황에서 통곡 대신 쓴 것입니다.” 1988년, 가장 끔찍했던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로… 서울 집에서 부산의 딸 집으로, 분도수녀원의 언덕방으로… 9월, 부산 첫째 딸네 집 1988년 온 나라가 올림픽의 환희로 가득 차 있던 그때, 박완서는 갑작스럽게 외아들을 잃고 만다. 어머니가 걱정된 첫째 딸의 성화에 부산의 딸네 집으로 내려온 작가는 기억 외에는 남아 있지 않은 아들을 생각하며 아직도 미치지 못한 자신의 강인한 정신을 탓한다. 그리고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아들을 데려갔는지, 신을 향해 그 이유를 묻고 또 묻는다. 이런 물음은 신을 향한 증오로, 마침내 살의로 치달으며 작가는 울부짖음에 가까운 기도를 토해낸다. 그럼에도 아들을 앗아간 신은 끝끝내 응답이 없다. “사생결단 죽이고 또 죽여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다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최대의 극치인 살의(殺意), 나의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암 있어야 하구말구.” 10월, 부산 분도수녀원 언덕방 서울 집으로 가서 홀로서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박완서는 이해인 수녀의 제안으로 부산 분도수녀원의 언덕방에 머물 기회를 얻는다. 뒤돌아서 다 토했을지언정 여봐란듯이 밥 반 공기를 먹어 치우며 딸의 허락을 받았지만, 막상 언덕방에 도착해 마주한 고립감은 아주 고약했다. 이후 사흘을 밤새 방 안을 데굴데굴 구르고 몸부림치며 신에게 한 말씀만 달라며 애걸복걸했지만 끝내 응답은 얻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을 흘렀고 작가는 수녀원의 수녀님과 도움을 받는 노인들, 젊은 방문객들 틈에서 죽음에 대한 갈망 또한 교만이라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다. “따라 죽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교만이요, 환상이라는 걸 받아들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은 살 궁리인가? 역겹고 비참하지만 자신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 어쩌랴.” 10월, 부산 분도수녀원 언덕방, 화장실 신병을 얻은 딸에 대한 근심을 토로하던 옆방 방문객에게 박완서는 아들을 잃은 자신도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살아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불행이 타인에게 위안이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 심경으로 옆방 방문객과 마주 앉아 먹은 점심은 결국 제대로 얹혔고 먹은 것을 다 토해낸다. 그리고 그때 문득 든 생각, 도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아들을 앗아갔냐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 신의 계시처럼 머릿속에 떠오른다. 작가는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궁극적으로는 신과도 고통을 나눌 줄 몰랐던 것이 가장 큰 죄였음을 깨닫는다. “나의 고통까지도.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그해,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서울 집으로 죽고 싶다는 정신의 소망을 따라주던 박완서의 육체는 그날 이후 끼니때가 되면 배고픔을 여실히 드러냈고 육신과 정신의 분열 앞에 작가는 창피하고 슬퍼한다. 그러나 몸은 회복되었어도 살아갈 의욕까지 온전히 찾지는 못했기에 서울 집에 혼자 머무르지 못하고 막내가 사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난다. 하지만 그곳은 이질적인 언어로 가득 찬 세상이었고, 그 참을 수 없는 외로움으로 겨울을 나기도 전에 서울로 급히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몇 달 후, 작가는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다.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는 것은 작가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아들이 없는 세상도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이후, 다시 언덕방으로 분도수녀원을 처음 갈 때만 해도 박완서는 그곳을 속세를 벗어난 도피처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막상 머물게 된 수녀원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가장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죽음에서 삶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고, 끝내 생명의 가장 필수적인 식욕을 되찾는다. 이후에도 작가는 해마다 언덕방 손님을 자처하며 그곳에 머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수필 「언덕방은 내 방」과 그곳으로 작가를 이끌어준 이해인 수녀님께 보내는 손 편지는 참척의 고통을 견뎌낸 이후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지금 같은 고통으로 힘겹다면, 삶의 막다른 길에 놓인 것 같다면 이 책에 담긴 작가의 살아 있는 위로를 건네받기를 바란다. “88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 소리가 나올 적이 있을 만큼 아직도 생생하고 예리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가까이 계시어 분도수녀원으로 저를 인도해 주신 것은 그래도 살아보라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 2005년 이해인 수녀님께 보낸 편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