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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들어가는 말 1 한국의 맹자 · 조선의 주필 조선의 언론 제도와 언관 율곡 율곡을 왜 언론가라 하나 더 읽어 보기: 시호는 이렇게 정한다 율곡의 소통 정신과 언론관 〈맹자는 나의 스승이다〉-율곡과 맹자 2 글로, 말로 국궁진췌 49년 대표적 언론 활동 상소 더 읽어 보기: 10만 양병설 논란 거침없는 면대직언(面對直言) 냉엄 강직한 인물 평가 민간의 관보 간행과 율곡 부단한 저술과 교육 활동 향약에 담긴 안민 정신 3 만세에 우뚝한 큰 스승 늘 쾌직했던 어지럼증 환자 더 읽어 보기: 「유지사」에 담긴 맑은 로맨스 율곡 어록 율곡의 「언행난(言行難)」 더 읽어 보기: 율곡은 삭발을 했었나 율곡 사후의 평가와 존숭 부록: 율곡 시장(諡狀) 전문 율곡 연보 참고문헌 |
저임철순
호 : 담연(淡硯)
율곡은 공물(貢物) 변통, 즉 공안(貢案) 개혁을 체계적으로 주장하고 10만 양병설을 제시한 탁월한 관료이자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였다. 율곡의 개혁이 좌절된 이유는 그의 이상적 성향과 함께 〈성격이 굳세고 과격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친소(親疏)와 관계없이 사람들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 p.12 조선은 개국부터 나라가 망할 때까지 언로가 트였는지 막혔는지가 늘 현안이었던 〈언론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신하나 백성이 군주에게 정책이나 시책을 건의하거나 임금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는 제도적 확립〉을 의미한다. --- p.25~26 조선 왕조 시대의 언론이라면 ① 말과 글을 통해 드러난 각 개인들의 의견이나 행적, ② 언론을 담당하는 기구, 이른바 언론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의견 개진을 통해 형성된 여론을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p.30 이순신의 일기가 임진란 전쟁 기간에 진중에서 쓴 난중일기라면 율곡의 『경연일기』는 국가 변란과 망국의 위기를 체감하며 쓴 〈파국 기간의 난중일기〉와 다름없다. 그의 『경연일기』는 명종-선조 연간의 조선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주는 기록물이다. --- p.37 경연은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ㆍ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 또는 그런 자리를 말한다. 조선의 경우 경연을 담당하는 부서는 집현전 홍문관이었다. 이 부서는 춘추관의 사관, 사간원 사헌부의 언관과 함께 언론국가 조선을 지탱케 한 세 발의 정족(鼎足)이었다. --- p.37 율곡은 언론인에게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추고 시종여일 언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38 평시에 위기와 파국을 생각하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우환(憂患) 의식과, 현장을 떠나지 않고 밀착해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언론 감각이 율곡의 생애를 형성하고 관통한 요소였다. --- p.39 율곡은 왕도 정치를 실현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율곡은 『동호문답』 제8장에서 ①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과 ② 말을 아끼지 말 것, 두 가지를 주문하고 있다. --- p.45 백성의 언론(말과 글)이 조정에 전달되는 여론 통로를 〈언로(言路)〉라 했고, 이 언로가 열리느냐 막히느냐에 나라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조선 시대 언관과 사대부들은 믿었다. --- p.55 조선 시대에 언로를 여는 방법으로는 첫째, 서면 언로로 글을 쓸 줄 아는 신분 계층에 해당되는 상소 제도가 있고, 둘째, 구두 언로로 임금을 면대할 수 있는 조정의 고위 관리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열려 있었다. 셋째는 행동 언로로 격쟁(擊錚) 등 시위 형식을 통해 의사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 p.73 율곡은 그런 점에서는 융통성과 유머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근엄하고 명쾌하고 정직한 말은 듣는 사람들올 질리게 하거나 큰 상처를 입게 한다. 선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율곡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존중은 하되 건의된 시책을 따르지는 않았다. --- p.97 『경연일기』의 인물평은 율곡 생전은 물론 타계 직후에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만큼 냉엄하고 정직한 기록이어서 큰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율곡 사후 그의 절친한 벗인 우계(牛溪) 성혼이 율곡문집을 편찬할 때 저자의 다른 어떤 글보다 중요하게 평가하면서도 당시 기휘(忌諱)해야 할 내용이 많아 간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율곡보다 100년 뒤의 사람인 박세채가 율곡전서 외집(外集)에 끼워 넣어 간행했다. --- p.112 율곡이 강조한 것은 향약이 단순히 도덕적 교화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며 백성들의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목사(牧使)로서 행정을 맡았던 서원(西原)과 그 뒤 은퇴해 살고 있던 해주의 여러 지역에서 지역 특성에 맞게 향약을 스스로 창안해 운영했다. --- p.149 쾌직은 원래 글을 평할 때 쓰는 말이었다. 시나 글이 직설적으로 서술돼 함축성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 쾌직이다. 율곡의 쾌직을 〈지나치게 명쾌하고 정직했다〉고 번역한 글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쾌직의 뉘앙스가 살아나기 어렵다. --- p.157~158 어려서부터 병이 있었던 율곡은 약을 달고 살았다. 평소 현훈증(眩暈症)이 있었던 율곡은 병중에 억지로 왕명을 받들어 나가던 중 등청하지 못하고 병조에 누워 있다가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죄목이 더해져 탄핵을 당했다. --- p.160 율곡은 글씨에도 능해 조자앙(趙子昻, 조맹부)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그림으로 유명했고, 누나 매창(梅窓)과 막내아우 우(瑀)도 각각 그림과 서예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다. 율곡도 소질과 능력이 풍부했다. --- p.164 왕조 시대에 쓰던 말에 쾌잠(快箴)이라는 게 있다. 임금의 기분이 좋을 때를 골라 올리는 잠계(箴戒)를 말한다. 사람들은 왕과 대통령의 기분을 살피고 진언을 할 기회와 계기를 엿보는데, 율곡은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 p.164~165 |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
조선 시대 언관과 사대부들은 백성의 말과 글이 조정에 전달되는 여론 통로를 〈언로(言路)〉라고 했고, 이 언로가 열리느냐 막히느냐에 나라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믿었다. 저자는 율곡이 〈언론인에게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추고 시종여일 언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언론가(言論家) 이율곡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한다. ① 시의에 맞는 상소(「만언봉사」 등)와 특별한 저술(『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통해 정론직필을 펼친 논설위원이자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② 객관적인 기술과 사실 묘사(『경연일기』)로 역사 기록을 남긴 현장 기자, ③ 냉엄한 인물 평가(『경연일기』)를 통해 국정과 용인의 잘잘못을 가린 분석?해설가, ④ 일상의 언행과 국왕 면대를 통해 할 말을 다한 실천 지성, ⑤ 철저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 개혁 방략을 제시한 대기자(大記者). 지금은 나라에 기강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이런 상태로 간다면 다시는 희망이 없습니다. 반드시 주상께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일시에 일깨워 기강을 세운 뒤에라야 나라가 될 것입니다. 기강은 법령과 형벌로 억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정이 착한 것을 착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여 공정함을 얻어 사사로운 마음이 유행하지 않아야만 기강이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어떻게 서겠습니까? - 선조 6년(1573) 경연 중에서, 본서 100면 비유컨대, 임진왜란을 겪고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남긴 서애 유성룡이 사실(史實)에 충실한 투철한 종군기자였다면, 경연 활동과 상소, 계, 저술 등을 통해 국가의 나아갈 방향과 개혁 방략을 제시한 율곡 이이는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이었던 셈이다. 정론 직필의 율곡이 살아 있다면 〈친소(親疏)와 관계없이 사람들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율곡은 왕이나 동료 사림들로부터 두렵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의 글이나 말에는 해학이나 유머가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정론 직필, 직언〉이다. 그가 선조를 향해 쏟아내는 글은 읽는 이들조차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신랄하다. 전하께서는 오늘날 국가의 형세에 대해 의관만 정제하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끝내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바로잡아 구제하고 싶어도 그 대책을 모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뜻이야 갖고 있지만 어진 신하를 얻지 못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여기십니까? 그도 아니면 흥하든 망하든 천운에만 맡기고 인력을 들이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 1582년(선조 15년) 9월 세 번째 「만언봉사」 중에서, 본서 84면 〈시대와 겨루고, 왕과 속유(俗儒)들과 다투고, 자신의 건강과 싸우느라〉 율곡의 삶에는 〈윤기〉와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율곡은 12년이 조금 안 되는 벼슬살이 기간에 크고 작은 업적을 남겼다. 동서 붕당을 보합(保合)하려고 애썼고, 특히 경제사(經濟司) 설치, 과세 제도와 인사 제도 개혁, 서얼(庶孼) 허통책 실시, 10만 양병설 등 현실에 바탕을 둔 구체적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을 존중은 하되 건의된 시책을 따르지는 않았다. 동과 서로 편이 갈린 사림은 율곡의 말을 받아들이기보다 시비하고 탄핵하기 바빴다. 그렇게 세 번째 만언봉사를 임금에게 올리고 2년 뒤 율곡은 영면했다. 임진왜란 8년 전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평시에 위기와 파국을 생각하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우환 의식과, 현장을 떠나지 않고 밀착해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언론 감각이 율곡의 생애를 형성하고 관통한 요소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만약 율곡이 〈더 살았더라면, 영의정에까지 올라 좀 더 나라에 기여할 수 있었다면 나라 꼴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런 안타까움은 오늘날 우리 정치와 사회 현실, 언론까지 닿아 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기개, 〈나라의 공론을 주도하고 글과 말로써 시대의 나아갈 방향을 밝혔던〉 정론 직필이 희미해지는 지금, 저자가 굳이 이율곡의 목소리를 꺼내 글로 전하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