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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를 펴내며 유머의 동지를 찾아서
들깨 지배자의 몰락 김민하 누구와 웃을 것인가 복길 나락에서의 농담 안담 강간 농담 성공하기 김영욱 보고서: 루소와 밀레의 우정 김혜림 나는 나를 보고 웃지 염문경 칼을 들고 다니는 여자 엄일녀 미련한 이모 김은한 오래 퍼지는 늑대 웃음소리 참고 문헌 지난 호 목록 |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아무도 듣지 않는 넋두리를 주워섬기다, 문득 햄버거 가게를 떠올렸다. 그리고 대충 벗어 놓았던 외투와 신발에 몸을 꿰고 집을 나섰다. 식욕보다 더 어두운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 들깨 「지배자의 몰락」 “독재자와 그 지지자들은 자신들 혹은 자신이 지지하는 체제가 웃음거리가 되길 원하지 않아서, 또한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독재 시도가 현실적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농담은 이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기를 바라지 않는 자들과 싸우기 위해, 그러니까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여전히 무기로서의 농담은 필요하다” ─ 김민하 「누구와 웃을 것인가」 “만약 유머가 자신의 고통과 타협하지 않기 위한 싸움의 한 방식이라면, 절망은 그것을 터득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일 것이다. 카광의 유머는 웃음을 촉발해 좌절을 무마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반지하의 생존자 유머와 유사하다. 둘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식의 농담을 반복하지만, 정작 그들의 유머에서 중요한 것은 그 뒤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좌절과 분노다. 나는 절망 속에서 세상이 무서워질 때마다 그들을 봤다.” ─ 복길 「나락에서의 농담」 “이후로 나는 웃음을 탐구하는 사람은 사실은 힘의 문제를 탐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내 느슨한 도식은 이랬다. 힘을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은 폭력적이 된다. 힘을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은 슬퍼진다. 두 경우가 모두 비극이다. 그 사이 어드메에 희극이, 웃음이 있다. 다음번엔 꼭 웃기고 싶었다.” ─ 안담 「강간 농담 성공하기」 “이제 보고할 유머는 일반적 범주 바깥에 있다. 이 유머는 집단지성의 한 유형으로서 말하자면 집단유머다. 그런데 화자들은 웃기려는 의도를 품지 않고 청자들은 좀처럼 웃지 않는다. 이 유머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것을 유머로 소개하는 행위는 엘리트주의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요구되는 지식은 너무 시시하므로 본래 웃음이란 진리의 폭로일 뿐이라고 항변한다면 그것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내 변명은 내가 이 유머를 웃어넘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 김영욱 「보고서: 루소와 밀레의 우정」 “이상한 옷을 입고 출근하는 나의 불안을 그대로 이해하고, 그 진동을 놀려먹기 위해 왜곡하지 않는 유머. 자아와 세계의 불일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러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 유머는 단순히 무언가를 흉내 내거나 공격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니까. 적대가 아닌 우정의 유머에는 다음 단계에 대한 상상력이 존재한다.” ─ 김혜림 「나는 나를 보고 웃지」 “영화는 ‘마초스러운 시나리오를 쓰며, 남혐이라는 단어를 태연하게 오프라인에서 뱉어버리는 남자’를 희화화한다. 하지만 동시에 ‘남성성을 극히 혐오하며, 센 척으로 스스로를 무장하는 여자’도 일정 부분 희화화한다. 멀리서 보면 모두 웃기다. 나는 일단 함께 웃고 싶었다. 그래서 둘 다 제법 귀엽게 비호감이길 바랐다. 그러다 천천히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하고 싶었다. 저 남자가 왜, 저 여자가 왜 저러는지.” ─ 염문경 「칼을 들고 다니는 여자」 “예적금밖에 모르던 이모가 내 덕에 주식 투자에 눈을 떴다니까요. 근데 내가 테슬라는 꼭 사라고 그렇게 찍어 줬는데 일론 머스크 꼴 보기 싫다면서 끝끝내 안 사더라. 아니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일론이 공화당에 수억 달러를 기부하든 트젠을 혐오하든 무슨 상관이냐고요, 당장 트럼프 당선되자마자 테슬라 주가가 두 배로 뛰었는데!” ─ 엄일녀 「미련한 이모」 “한 해를 돌아보며 다이어리를 뒤져 보니 아뿔싸, 생각보단 제법 웃고 지냈다. 크게 웃은 기억도 있지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보단 은은하게 오래 웃은 시간을 말하고 싶다. 손난로처럼 미적지근해도 계속 남아 있는 시간.” ─ 김은한 「오래 퍼지는 늑대 웃음소리」 --- 본문 중에서 |
네가 웃는데
나는 웃지 못할 때 농담 같은 현실에 실소하다가도 이내 웃음기를 거둔 채 맞은 새해. ‘웃을 일이 아니다…….’ 어두운 시절에 어떻게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편》이 ‘유머’ 호에서 필자들에게 답을 청한 질문은 두 가지다. 무엇을 보고 웃나요? 그리고 누구와 함께 웃나요? 웃음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기준이다. 어떤 모임에 나가고 특정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내가 웃기 때문. 함께 웃지 못하는 공동체는 끝내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어긋나는 웃음은 서로의 사이와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떤 유머에 누군가는 자지러지지만 다른 누군가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공감하며 웃는 사람 옆에 조롱의 웃음을 짓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웃음의 격차를 드러내고 메우면서 마침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 절망이라는 조건에서 나와 세상을 알아가기 진지한 현실에서 기발한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야기가 만들어 내는 격차는 웃음을 자아낸다. 소설가 들깨의 「지배자의 몰락」이 묘사하는 현실은 악의로 가득하지만, 세상에는 악을 막을 수 있는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것들도 있다. 정치평론가 김민하의「누구와 웃을 것인가」는 불법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응원봉과 오타쿠 깃발이 등장한 시위의 의미를 짚는다. 독재자가 숭고함으로 무장하고 농담을 말살할 때, 거리로 나온 일상적 농담들은 앞으로 이어질 긴 겨울을 버틸 귀중한 자원이다. 인플루언서로서 느끼는 부자유와 질병의 통증 속에 침잠하던 작가 복길은 「나락에서의 농담」에서 유머의 조건을 사유한다. 유머가 “자신의 고통과 타협하지 않기 위한 싸움”이라면, 절망은 유머를 터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다. 작가 안담의「강간 농담 성공하기」는 정확한 웃음을 생산하기 위해 타인을 관찰하고 자기를 탐구한 기록이다. 불문학자 김영욱은 「보고서: 루소와 밀레의 우정」에서 온라인상 거짓 소문의 기원을 조사하며 모르는 이들의 삶을 엿본다. 내 농담에 웃지 않는 이들의 얼굴에 비추어 나를 알아가듯, 얼굴 모르는 이들의 글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은 세상에 대한 유머러스한 이해를 선사한다. 꼰대와 MZ 사이, 페미와 한남 사이, 주식투자와 금투세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며 웃음의 동료를 찾자 유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서 나를 표현하는 고도의 전략이기도 하다.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염문경의 「칼을 들고 다니는 여자」는 ‘페미’와 ‘한남’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농담을 무기로 삼은 화 많은 창작자의 회고다. 채만식의 「치숙」을 패러디한 번역가 엄일녀의 소설 「미련한 이모」에서는 ‘갓생’을 사는 조카와 페미·운동권·이혼녀가 충돌한다. 소설 속에서 주식투자에 명운을 건 조카와 금투세를 찬성하는 이모 사이에는 긴 강이 흐르지만, 창작물을 통해 멀리서 한번 웃고 나면 독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대에게 다가갈 용기가 생길 것이다. 웃음의 미묘하고 어려운 점은 언제나 의외의 순간에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웃고 웃기기 위해서는 우연을 위한 여백을 남겨 놓고 웃음의 감각을 열어 두어야 한다. SNL의 ‘MZ오피스’를 보고 웃을 수 없었던 MZ세대 편집자 김혜림은 「나는 나를 보고 웃지」에서 타인의 객관을 걷어 내고 함께 솔직해질 수 있는 유머의 형식을 찾아간다. 배우 김은한의 유머 리스트이자 작업 노트인 「오래 퍼지는 늑대 웃음소리」는 다정한 문체로 “은은하게 오래 웃은 시간”을 일깨운다. 새해를 맞아 독자들이 ‘유머’를 읽으며 희미해진 웃음의 기억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웃기 어려운 시절, 좋은 유머는 멀리멀리 퍼지는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구석구석 스며들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인문잡지 《한편》 끊임없이 이미지가 흐르는 시대에도, 생각은 한편의 글에서 시작되고 한편의 글로 매듭지어진다. 2020년 창간한 인문잡지 《한편》은 글 한편 한편을 엮어서 의미를 생산한다. 민음사에서 철학, 문학 교양서를 만드는 젊은 편집자들이 원고를 청탁하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이 글을 쓴다.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을 통해, 지금 이곳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기쁨을 저자와 독자가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한편》 16호 ‘유머’에 적용된 글꼴은 SD 커오히체. 굴림체를 뻥튀기처럼 부풀린 천연덕스러움으로 진지한 궁서체 책들 사이에 틈을 낸다. 인문잡지 《한편》은 연간 3회, 1월·5월·9월 발간되며 ‘세대’, ‘인플루언서’, ‘환상’, ‘동물’, ‘일’, ‘권위’, ‘중독’, ‘콘텐츠’, ‘외모’, ‘대학’, ‘플랫폼’, ‘우정’, ‘집’, ‘쉼’, ‘독립’, ‘유머’에 이어 2025년 5월 ‘한국’를 주제로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