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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캣맘이 있다
‘석수’ 겨울 캣맘 1 캣맘 2 후디 이야기 타투 당신의 가방을 보여주세요 여기 캣맘이 있다 이사 홍콩, 안녕히 “나는 동물권 옹호자입니다” 빨간 애 채식을 하며 알게 된 것 1 “그냥 먹을게요” 채식을 하며 알게 된 것 2 너구리와 개미 변신 사육곰 머리 냄새 세미나 살리는 예술 오웰과 네루다 오멜라스로 돌아가는 사람들 피아졸라와 풀벌레 반지하 실격당한 사회를 위하여 보니것은 알고 있다 뛰는 작가 Second Reformed 여름날의 개들 주유소의 개들 1 주유소의 개들 2 B아저씨 플라 2차 접종 다시, 동물권 동물과 언어 미디어의 동물 착취에 대하여 동물병원 동물 전성시대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 겨울을 좋아하세요? 맺는 글 추천사 - 김금희, 정세랑, 박정민 |
저박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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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시간에 나가서 한 마리라도 더 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딘가에 밥을 기다리는 아이가 또 있을지 모른다.’ 이 하잘것없는 글이 아이들에게 밥 주고 물 주는 것보다 가치 있는지, 나는 여전히 결론 내지 못했다.
--- p.23 고양이 급식소에 대변이라니, 당황스러워서 화도 나지 않았다. 만취한 사람이 자기 집 화장실로 착각하고 볼 일을 본 것일까? 화장실을 찾을 여력이 없을 정도로 급했던 걸까?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궁리해보았지만 어떤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중략) 이후 나는 캣맘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 다른 수수께끼와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한 손엔 사료 봉지를, 다른 손엔 무엇이든 주워 담을 수 있는 빈 봉지를 들고 집을 나선다. --- pp.26-28 타투를 하기로 결심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나는 변하지 않을 어떤 것을 몸에 새기고 싶었다. 고양이들을 반려하면서 내 삶은 달라졌고, 달라진 채 지속될 것이었다. 사는 동안 추구할 가치가 몇 가지나 될지 모르지만, 동물을 사랑하고 그들의 권리를 찾는 데 힘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포부만큼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시원을 타투로써 기념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 p.44 우리 동네에는 그간 우리를 스쳐간 수많은 고양이들과의 추억이 묻어 있고, 지금도 밥자리에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고양이들이 있다. 성묘가 되어 영역을 이탈한 고양이들이 언제고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도, 나와 동생은 항상 품고 있다. 그러니 이 동네는 평생 우리가 책임져야 하고, 책임질 것이다. 후임 캣맘조차 구하지 않고 매정하게 이사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길고양이는 정기적으로 밥을 주는 이에게 많은 것을 의지한다. 특히 중성화수술을 한 고양이들의 경우 사냥 능력과 의지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때문에 캣맘이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책임감을 요하는 일이다. 이미 자신에게 완전히 기대게 된 고양이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집에서 반려하던 비인간 동물을 유기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 pp.61-62 처음 마스카라 테스트에 동원되는 토끼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마스카라는 토끼의 죽음으로 만들어진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지웠다. 희생은 어딘가 자발적인 냄새를 풍긴다.) 화장품 회사 사람들은 좀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눈을 깜빡이지 않는 토끼의 습성이 마스카라의 지속성 테스트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토끼를 움직이지 못하게 틀에 잡아 가두고, 눈 점막에 화학 물질을 넣는다. 이 과정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목이 꺾여 죽은 토끼가 허다하다. 인간의 잔학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토끼는 끝내 안락사되고, 안구는 적출돼 연구용으로 쓰인다. 토끼의 죽음으로 더 길어진 속눈썹을, 나는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토끼의 죽음으로 크고 또렷해진 눈매를 나는 매력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얻는 것을 아름다움이라 부를 수도 없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아름다움과 수천 수만 마리 토끼의 목숨을 바꿀 수는 없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아름다움이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어진다. --- pp.118-119 동물권에 눈뜨고 나서 나는 자주 괴로운 마음으로 잠들었다. 충격적인 기사를 보고 울면서 출근할 때도 많았다. 이 ‘앎’은 자주 나를 뒤흔들고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비인간 동물과 그들의 삶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이 불편함을 아는 채, 그리고 안은 채 남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기에,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시초지에 남는 편을 택할 것이다. --- p.138 동물들을 구조하고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내게 친구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지금 행복하냐”고. “그 과정에서 정말 행복한 게 맞느냐”고. 그럴 때마다 고민에 빠졌다. ‘행복’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람들은 생의 화두로 저마다 행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게 ‘행복론’은 외려 매정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동물들을 구조하면서 삶은 하루하루 전투 같았다. 아픈 동물들을 치료하며 몸 편할 틈 없었고, 버려진 동물을 돌보며 마음 편할 날 없었다. 세상엔 늘 풀어야 할 문제가 있고, 그 문제로 아파하는 소외된 존재들이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찾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행복하겠다는 것은 결국 다른 존재에게 눈감겠다는 뜻 아닐까. --- pp.167-168 우리 사회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동물은 기쁨과 고통을 모두 느끼며, 개별적인 뜻과 의지를 가진 존재다. 그런데도 인간은 동물이 약자라는 이유로 그들을 원하는 대로 휘두르고 ‘소비’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동물은 ‘사회적 약자’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조차 못할 때가 많다. 약자로 규정되는 것 역시 구성원들의 합의가 있을 때, 다시 말해 성원으로 인정받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예술이라면, 달라야 한다. 예술은 작고 약한 생명을 위한 옹호이자 지지여야 한다. 가장 작은 존재가 딛고 의지할 수 있는 부목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다치고 지워져야 한다면, 거기엔 예술이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내가 아는 한 배제와 착취는 예술과 가장 먼 단어다. --- pp.214-215 |
생명의 무게가 어떻게 다른지 묻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에게 존엄이라는 단어가 기울어진 저울은 아닌지, ‘비인간 동물’이 존엄의 말을 달기엔 너무 가벼운 존재이고, 과분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살리는 일』이 품어 안는 존엄의 대상엔 한계가 없다. 길고양이에서 쓸개즙을 채취당하는 곰으로, 화장품 실험대상이 된 토끼에서 소외된 사람들로 이어진다. 동물권에 눈뜨고 나서 자주 괴로워했다는 작가는 그렇게 아파한 만큼 넉넉한 품을 지니게 되었다. 이 책이 ‘살리는 일’의 의미를 다각도로 보여줄 수 있는 이유다. 이 책은 크게 5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 캣맘이 있다」에선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하며 겪는 일화를, 「나는 동물권 옹호자입니다」와 「살리는 예술」에선 고양이를 보살피는 일이 다른 동물을 구조하는 일로, 먹고 입고, 읽고 듣는 일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여름날의 개들」과 「다시, 동물권」에선 주유소에 방치된 개를 돌본 이야기에서 시작해 ‘미디어의 동물 착취’ ‘동물의 위계’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지적한다. 결국 『살리는 일』은 동물권이라는 말을 독자의 생활로 강하게 밀어 넣는다. 일상의 정물 속에서 한때 살아 있던 동물의 맥박을 느끼게 한다. 그 사실을 아는 게 우리에게 생경하고 때로 참혹하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자각하는 의무를 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똑같이 호흡하는 존재로 태어나 안락함과 불편함이 뭔지 알고, 질병의 고통과 회복의 위안을 아는 동등한 ‘동물’로서 말이다. “다른 생명의 목숨줄을 밟고 그 위에 서서 숨 쉬는 것은 멈춰야 한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과 나뿐이다.” - 본문 중에서 - “꾸준히 작은 존재들을 살리는 일”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박소영 작가는 새벽녘의 칼바람 속에서, 식용견 농장주 앞에서, 희망이 아득한 작금의 현실 안에서 꾸준히 작은 존재들을 살린다. 그 순수한 사랑이 냉철한 시선과 어우러져 독자들로 하여금 순간의 동정보다는 묵혔던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아직은 소수의 싸움이지만 끝내는 모두가 맞들어야 하는 ‘생명’의 문제를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때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들과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현실이 그녀를 좌절하게도 만들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좌절과 불행을 상쇄할 만큼의 사랑을 언제나 동물들에게서 돌려받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이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일. 새 힘을 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 작은 힘이나마 누군가를 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살리는 삶’을 살고 싶다.” - 본문 중에서 - “인간 박소영, 캣맘 박소영” 생명을 돌보는 일이 왜 편견과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인가 “캣맘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 다른 수수께끼와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엔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등장한다. 길고양이 급식소에서 누군가의 ‘대변’을 발견하거나 (의도적으로 캣맘들을 저격하듯이 전시된) ‘남성 팬티’를 목격한 일, 젊은 여성과 캣맘이 합쳐졌을 때 겪게 되는 무섭고 불편한 일들 말이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일은 여성과 사회적 약자(노숙인, 장애인 등)에 대한 편견과 오지랖을 맨몸으로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을 때 “그렇게 고양이들 챙길 시간 있으면 집에 가서 부모님이나 좀 챙겨”라는 중년 남성의 핀잔은, “부모를 챙기는 것은 중요하고, 고양이를 챙기는 것은 하찮은가? (혈연이 아닌 길 위의 존재를 돌보는 일은 하찮은가?) 고양이 밥을 주는 사람은 모두 부모와 관계가 소원한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밥을 놓으러 갈 때마다 심장을 부여잡아야 하는 일들이 계속 생기지만, 저자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캣맘’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기검열한다. 작정하고 되받을 경우, 누군가가 고양이들을 해코지하거나 밥그릇을 없애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위해 최소한의 방어를 하는 게, 도리어 나 자신이나 내가 돌보는 생명체를 위협하는 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세상. 그런 세상 앞에서 저자는 말한다. “페미니스트로서 정체성은 캣맘으로서 정체성 앞에서 번번이 꺾일 수밖에 없다. 나는 힘없이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오늘도, 인간 박소영은 캣맘 박소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불편함을 아는 채, 그리고 안은 채 남은 삶을 살겠다” 누군가의 불행을 대가로 지불하는 행복은 영위의 대상이 아니니까 관용의 스펙트럼이 넓지 않은 사회에서 소수자(의 취향과 가치를 지닌 자)로 산다는 건, 불편을 생활화하는 일이다. 채식을 하고, 동물친화적인 물건을 사려는 저자도 여러 편리를 포기한다. 세세한 에피소드들이 때론 재미난 입담으로 ‘웃프게’, 때론 번뜩이는 검처럼 강렬하게 전개된다. 지성 두피를 가진 저자는 남자친구가 머리 냄새를 맡고 기겁한 이후, 두피 냄새를 없애기 위해 모 회사의 제품을 쓰면서 애정을 회복(?)한다. 그러나 악명 높은 동물실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기꺼이 ‘냄새’를 지니고 사는 걸 택한다. 또한 저자는 마스카라(여성용 화장품)가 토끼의 죽음으로 만들어짐을 이야기하며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얻는 것을 아름다움이라 부를 수도 없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그 아름다움과 수천 수만 마리 토끼의 목숨을 바꿀 수는 없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아름다움이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어진다”고 지적한다. ‘살리는 일’은 예술로도 이어진다. “예술은 작고 약한 생명을 위한 옹호이자 지지여야 한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다치고 지워져야 한다면, 거기엔 예술이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저자는, 비인간 동물의 처참한 삶과 감정을 외면하지 않은 작품을 하나하나 톺아본다. 어슐러 르 귄의 작품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으며 일생을 지저분한 우리에 갇혀 꼼짝 못 하는 동물들을 떠올리고, 작은 생명들의 애수를 연상케 하는 피아졸라의 음악을 들으면서 가슴께에 달라붙은 풀벌레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준다. 생명의 무게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사람에게로 귀결된다. ‘기호’가 아닌 단순히 ‘옆 사람’으로 간주되길 바라는 장애인의 소망과 집이 없는 이들의 사계절을 헤아려보는 마음으로 말이다. “약자를 위하는 마음은 또 다른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과 연결되고, 확장된다.” - 본문 중에서 - 온기로 가득한 이 때묻지 않은 문장들 속에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사랑의 가치가 시대를 막론하고 무엇보다 위대하며,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그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막다른 길 위의 생명을 사회의 허점과 장애물로부터 변호하는 사람, 몸이 젖은 솜처럼 고단해도 누구보다 섬세한 눈빛으로 웅크린 숨결을 찾아나서는 사람. 박소영 작가는 오늘도 또 다른 생명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
여기에는 캣맘으로서 사회부 기자로서 책을 읽고 쓰는 작가이자 배우들의 다정한 친구로서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풍경 속에 엄연히 자리하는 약자들을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의 용기가 읽는 내내 마음을 흔든다. 자신이 벌이는 분투들의 무게를 과장하지 않고 최대한 작고 겸손한 언어로 기록해 ‘비인간 동물’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식물의 홀씨처럼 세상에 멀리 날려가기를 바라는 마음. 그 곡진한 태도와 성찰은 욕심과 물신주의에 물든 일상의 패턴을 바꾸고 생명을 지닌 존재들이 누려야 할 세상의 정당한 지분을 마련하기 위한 소중한 출발점이다. 저자가 추운 날 새벽에도 어김없이 일어나 길 위의 존재들을 위해 마련해놓는 따뜻한 물 한 그릇처럼, 황망한 마음으로 거리를 서성이는 날들을 통과해 겨우 어른이 된 모두에게 이 책이 반가운 온기로 남으리라 믿는다. - 김금희 (소설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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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밥을 챙겨주었던 고양이가 있었다. 시계가 없이도 시간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친구였다. 어느 날 그 고양이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을 때 마음속에 작은 무덤이 생겼다. 자매와 함께 열다섯 곳이 넘는 길고양이 밥자리를 챙기고 있는 박소영 작가에겐 얼마나 많은 생채기가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작가의 눈길은 길고양이에서 주유소에 묶여 방치된 개에게로, 더운 겨울 때문에 겨울잠에 들지 못한 너구리에게로, 쓸개즙을 채취당하다 버려진 곰들에게로 점점 멀리 가 닿는다. 인간이 아닌 생명들에게, 그 생명들을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세계는 참혹하기만 하지만 이 압도적인 슬픔은 어쩌면 변화의 촉매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는 비폭력적 저항을 하는 인구의 3.5퍼센트로도 기존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는 연구를 내놓았는데, 박소영 작가야말로 그 3.5퍼센트에 속하겠구나 확신하게 되었다. 아물지 않는 마음을 안고도 가보지 않았던 방향으로 걷는 이들을 있는 힘껏 응원한다. - 정세랑 (소설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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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기자를 알게 된 건 10년이 조금 안 된 어느 봄날이었다. 당시 그녀의 관심사는 보통 책과 영화 그리고 공연과 배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슴속 깊이 품어온 아티스트를 인터뷰하는 날이면 전날부터 아이처럼 설레어했고, 의도치 않게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역시나 아이처럼 그이의 칭찬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그녀는 가끔씩 삶에 아파하는 나에게 책과 영화, 무엇보다 열린 귀로 위로를 선물하는 사람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난 어느 순간부터 소독약처럼 이 기자를 찾았다. 박소영과의 연락이 그전보다 뜸해졌을 무렵, 나는 또 한 번 어떤 상처로 그녀를 불러냈다. 메신저의 친구 목록을 훑어내려 그녀의 이름을 찾았고, 프로필은 그사이 고양이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양이들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되었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녀의 분위기는 그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흡사 진이 모조리 빠진 사람의 그것이었다. 좋아하는 감독을 만나러 간다며 설레하던 박소영 기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지금이 궁금했다. 과연 어떤 하루를 뒤로 보내며 살고 있는지 듣고 싶었다. 지금껏 내가 해오던 궁상맞은 이야기들 말고, 당신의 지금이 궁금해서 몇 꼭지의 글을 부탁했다. 글 속의 삶은 예상보다 전투적이었다.
그녀의 속은 늘 시끄러웠고, 자주 절망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이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만들어보자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건넸다. 박소영 작가는 보통 마감이 늦었다. 동물 구조와 글을 동시에 진행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원고가 모아지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동물을 구조하고 보살피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진심을 다했고, 많은 것을 포기했다. 한겨울 새벽 같은 이 작가의 고단함에 가끔은 내 가슴이 조이는 것 같았다. 당신의 삶에 당신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다그치고도 싶었다. 결국, “박 작가님, 행복해?”라고 물었고,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행복하지 않은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데는 분명 그것을 상쇄할 만한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고, 난 그것이 그녀의 사명감이라고 생각한다. 기자가 된 것도, 동물들을 구조하는 것도, 이렇게 글로써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비록 작은 목소리일지언정 우렁차게 질러보겠다는 사명감. 내가 왜 그녀를 소독약처럼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내어주고 남을 구하며 얻는 그 작은 안도가 그녀에겐 소중했을는지 모른다. 작지만 밝게 빛나는 그녀의 진심과 행동을 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의 진심과 행동에 남김 없는 지지를 보낸다. 여태껏 오만했던 인간들이 이제는 갚아야 할 시기가 왔고, 박소영 작가와 같은 사람들이 그 빚을 먼저 갚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은 실천은 결국 인간들이 해내야만 할 숙제고,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숙제를 잘 해결할 것이라는 걸 박소영 작가를 보며 위안한다. 이름을 찾지 못해 ‘제목 없음’의 ‘무제’로 이름 지은 출판사의 첫 책이 박소영 작가인 것에 감사한다. 그녀로 인해 ‘무제’는 이 사회에서 소외된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꼼꼼히 눈을 돌릴 것이다. 남몰래 쓸쓸히 아파하는 존재들을 위하는 마음. 그 소중한 마음을 깨우쳐준 작가의 글에도 감사를 보낸다. 끝으로 ‘무제’를 여는 데 용기를 주신 열린책들의 홍유진 이사님과 책과 밤, 낮의 곽지훈 사장, 그리고 이 책 『살리는 일』을 펴내는 데 기여해주신 이현숙 선생님과 석윤이 디자이너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리는 바다. - 박정민 (배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