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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별명 : Gabo
역조구호
마꼰도 사람들이 기억력이 회복된 것을 축하하는 사이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멜키아데스는 옛 우정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집시는 마을에 머물 예정이었다. 그는 정말로 죽어 있는 몸이었지만 외로움을 참을 수 없어 돌아왔던 것이다. 삶에 충실했다는 벌로 모든 초자연적인 능력을 빼앗기고 같은 종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그는 아직 죽음의 손길이 미치치 않은 이 세계의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긴 채 은판 사진술 개발에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 p.80 건강이 회복되어 가느라 머릿속이 아른아른할 때,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레메디오스의 먼지낀 인형들에 둘러싸여 그 시들을 읽음으로써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회고했다. 그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장래성 없는 전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죽음의 언저리에까지 이르렀던 자신의 경험들을 여러시간에 걸쳐 운문속에 녹여냈다. 그러면 그의 생각은 아주 명쾌해졌고, 생각들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검증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그가 헤리넬도 마르께스 대령에게 물었다. '친구, 한 가지만 얘기해 주게, 자넨 왜 전쟁을 하고 있는가?' '왜라니, 친구. 위대한 자유당을 위해서지' 헤리넬도 마르께스 대령이 대답했다. '그걸 알다니 자넨 행복한 사람이군. 난 말이야, 자존심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네' 그가 말했다. '그것 참 안 됐군' 헤리넬도 마르께스 대령이 말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친구의 놀란 표정이 재미있었다. '그래, 하지만 어찌 됐든, 왜 싸우는지 모르는 것 보다야 더 낫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말했다. 그는 친구를 쳐다보다가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또 말이야, 자네처럼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그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보단 낫지’ --- pp.205-206 고독한 두 연인은 만년의 시간들, 무자비하게 흘러만 가는 불길한 시간들의 흐름을 거스르며 항해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들은 두 연인을 환멸과 망각의 사막으로 끌어내기 위해 쓸데없이 애를쓰는 데 소비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시간의 위협을 알게 된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따 우르술라는 무절제한 간통으로 배태된 아이를 세상에서 충실한 사랑으로 맞이하고자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최후의 몇 달을 보냈다. 밤에 침대에서 서로 포옹을 하고 있으면, 달빛 아래에 있던 개미들이 시끄럽게 설쳐대는 소리도, 좀벌레들이 시끄럽게 사각거리는 소리도, 옆 방들에서 잡초들이 자라나는 지속적이고 선명한 바스락 소리도 그들을 겁주지 못했다. --- pp.297-298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본문 중에서 |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은 지금까지 여러 군데 출판사에서 번역되었고, 또 국내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번역 대본으로 사용하고 있는 판본이 영어본이거나, 그마저도 중역이 아니면 출처 불분명한 번역본(중복 출판)을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조구호 선생은 기왕에 나온 작품 중에서도 뛰어난 번역이라 할 수 있는 안정효 선생의 번역(문학사상사, 『미메시스』가 선정한 최고의 번역가와 번역작품)에도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보고, 보다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자 하였다. 단적인 예로, 문장의 흐름을 임의로 끊지 않았다는 점(원본에 있는 구두점과 번역서에 있는 구두점이 같다)과 단락 구분을 임의로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옮긴이는 “스페인어로 씌어진 원본을 ‘단 하나의 가감도 없이’ 번역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번역자는 또, 흔히 번역 과정에서 하는 우리말 교열이나 윤문에도 주의했다. 교열 · 윤문이 심할 경우, 우리말로는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지만 원문의 의미를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작품의 첫머리(1장)에서는 “세상이 생긴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들이 아직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지칭하려면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했다.”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야 ‘얼음’이라는 사물이 나오는데, 이때 이전까지는 ‘얼음처럼 차가운’이라는 비유는 쓸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그 사물이 ‘얼음’으로 불렸을 때 이후에야 비로소 ‘얼음처럼 차가운’이라는 비유가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번역본들은 원본에는 없는 이런 비유를 우리말 교열 · 윤문 과정에서 집어넣거나 창작해 낸 것이다. 또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사용한 다양한 어법 구사, 언어유희를 원문 그대로 살린 대목도 주목된다. 예를 들면, 안정효 번역본(문학사상사, 57-58쪽)에서는 “그들은 함께 모여 앉아서 끝이 없는 지루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똑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 되풀이하고,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자꾸만 계속했다. 얘기가 끝나면 얘기하던 사람이 그 얘기를 또 듣겠느냐고 묻고, 그러면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 얘기를 또 해달라고 하고, 그러면 같은 얘기를 또 하고 ……혹시 누가 그 얘기를 듣기 싫다 하더라도 그는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얘기를 또 해주랴고 물었을 때 아무 대꾸가 없어도 또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그 얘기가 자꾸만 계속되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 새도록 똑같은 얘기는 끝없이 되풀이되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조구호 선생은 “함께 모여 앉아 끝없이 얘기를 주고받고, 똑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이나 되풀이하고,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신경질이 날 정도까지 비비 꼬아서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얘기하는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또 들려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얘기를 듣는 사람이 그러라고 대답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듣고 싶다고 대답하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대답하라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자리를 뜰라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자리를 뜨라고 부탁한 적이 없고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는 등, 그런 식으로 며칠 밤이 새도록 지속되는 지독한 모임에서 밑도 끝도 없이 장난을 쳐 대곤 했다.”라고 번역한다. 앞의 번역에서는 원문이 축약되어 있고 가르시아 마르케스 특유의 언어유희를 느낄 수가 없는 반면, 조구호 선생의 번역에서는 원문에 대한 충실함과 함께 ‘언어유희’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 문학 속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21세기를 여는 작가 세계 문학사의 중심 무대 밖에 머물러 있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서서히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른바 ‘붐(Boom)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서였다. 특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보르헤스 등의 일군의 작가는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역량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그리하여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3년 동안 생각하고 18개월에 걸쳐 집필한 『백년의 고독』이 196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수다메리카(Sudamerica)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을 때는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비평가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즉각적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출판된 지 몇 개월 만에 동서 유럽의 20개 언어로, 현재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 특히 ‘고갈의 위기’에 처해 있는 작가들의 애독서가 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으로 소위 ‘소설의 죽음’이라는 주장에 반기를 들게 했고, 결국은 밀란 쿤데라로 하여금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로 소설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도록 만들었다. 세계 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고, 앞으로도 노력 여부에 따라 문학사를 바꿀 가능성이 예견되는 그의 눈부신 글쓰기는 현대를 멋지게 장식하면서 21세기를 여는 초석이 될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 : 또다른 리얼리즘의 극치 『백년의 고독』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모든 것이 결집되어 그 절정을 이룬다. 이 작품은 신화적 요소를 도입하여, 우르술란과 호세 아르까디오의 마콘도라는 도시의 건설을 그리고 있다. 이 둘은 서로 사촌간으로 둘 사이의 근친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가 달린 자식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초기의 외부와의 접촉은 멜키아데스를 중심으로 한 집시들의 방문이었고, 이들은 신기한 외부 문물을 마을 주민들에게 소개하게 된다. 이 신기한 외부 문물은 호세 아르카디오에게 외부 세계의 과학적인 지식을 받아들이도록 자극하는 기제가 된다. 마콘도의 고립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시장의 등장, 내전, 철도의 건설, 외국인 바나나 공장의 건설 등의 사건을 통해 외부 세계와 접촉하게 된다. 그러나 파업에 참가한 공장 노동자들이 대량 학살로 사망하고, 폭풍우와 가뭄이 농장을 파괴함에 따라 외국인 바나나 공장이 철수하고 다시 마콘도는 고독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은 진보와 신식민지라는 중남미의 상황에 대한 반영으로 읽힌다. 그러나 단순하게 마꼰도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보다 깊은 차원에서의 비극을 나타낸다. 즉 이야기의 끝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 멜키아데스가 남기고 간 원고를 해석하고, 이것이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원고를 읽는 동안만 이 이야기가 지속되리라는 것을 발견하는 데 텍스트가 갖는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 반복할 수 없는 고독한 행위이며 죽음의 행위가 된다. 결말은 비극으로 끝나고 삶 자체는 반복될 수 없으며 한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삶의 진정한 불안은 바로 반복할 수 없다는 그 사실에서 기인하고 이 공포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유머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품에서 죽음은 항상 마술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이해된다. 또한 『백년의 고독』의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가 신화를 이야기 속에 도입하고 환상적인 전개를 통해 사실주의에서 탈피했다는 데 있다. |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밀란 쿤데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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