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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끌어안기 11
옮긴이의 말 166 |
저로르 아들레르
Laure Adler
역백선희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과 화해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나 자신과의 거리 좁히기가 말로써 가능할까? 빈약한 말들. 글로 쓰이는 말들, 내뱉어지는 말들, 들리는 말들, 훔친 말들, 당신 모르게 떠도는 말들, 당신을 향하지 않는 말들, 그 말들 속에 파묻히는 일만이 나를 살아 있게 한다.
--- p.29 레, 미. 녀석의 이름은 그러니까 레미가 되었다. 단순하고, 밝고, 바위틈의 물처럼 투명한 이름이다. 녀석의 존재가 꼭 그랬다. 우리를 따라다니던 행복이 그랬다. 미, 레. 녀석이 태어나리라는 약속이 알려졌을 때부터 레미의 미가 우리 둘을 따라다녔다. 레미는 우리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놓는 이름이다. 레미는 부드러운 금발에 성격이 순한 사내아이, 읽기 교과서에 나올 법한, 더없이 평온한 그런 아이였다. 음표 같은 레. 나이 든 지휘자가 우리에게 작품의 구조를 더 잘 들려주려고 한 악장을 잠시 도중에 멈추기까지 했던, 지난겨울 들었던 사중주의 화음 같은 미, 레. 놀림감이 되거나 별명이 붙지 않을, 환하게 빛나는 짧은 이름이다. 선명하고 단호하고 쉬운 이름. 그것은 또 하나의 피부요, 새로운 주거지다. --- p.41 내가 글을 쓰는 건 거리를 두고 시간을 길들이기 위해서다. 시간이 약이지요……. 형식적인 절차들을 끝마쳤을 때 병원에서 마주친 한 노파가 내게 말했다. 나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었다. 그건 거짓말이자 모욕이다. 시간이 흘러도 아무것도 지워지지 않고 아무것도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안으로는 몸이 아기의 자리를 잊지 못하고, 밖으로는 팔이 아기를 품었던 품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시간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수없이 새끼를 낳는 암고양이처럼, 어미가 새끼들을 버리고 떠날 수도 있다고 믿게 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p.46 레미와 함께라면 나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자각에서 오는, 피할 길 없는 실망감에 맞설 자신이 있었다. 한낮의 양털 같은 하늘의 아름다움을 그 아이와 나누고 싶었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의 어루만짐을, 그럴 때 덮쳐드는 가벼운 한기를 아이가 피부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 파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열기와 안식을 찾기 위해 바다로 곧장 달려가게 만드는 그 한기를. --- p.51 병원에서 나가기 위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아들과 떨어진 채 맞이하는 첫 번째 밤이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우리는 아이에게서 멀어졌다. 아이에게 말도 없이, 무슨 일인지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혼자 남겨두었다는 느낌은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 p.78 아들 없는 첫째 날 밤에 우리가 잠을 잤던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낮과 밤의 질서가, 깨어 있음과 잠의 질서가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 p.81 |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글쓰기
17년 만에 솟아난 기나긴 추모이자 애도 일기 『상실 끌어안기』는 생후 9개월의 아들 레미를 병으로 떠나보낸 어머니 로르 아들레르의 회고록이다. 아이가 죽은 지 17년이 되던 날, 우연히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저자는 한밤중에 불쑥 이 글을 써 내려갔다. 황홀했던 임신 기간과 태어난 아이와 함께한 행복했던 순간들부터 아이의 오랜 투병생활 그리고 마지막까지. 더없이 생생하고 진솔한 고백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그 광경을 눈앞에 둔 듯, 아이를 잃은 엄마의 애도에 함께 저릿한 마음으로 동참하게 한다. 질서 정연하게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긴 채 파편들로 제시되는 그의 문장을 읽다 보면, 말과 말 사이 공백에 묻어둔 슬픔이 절규 없는 비명이 되어 들려온다. 아들에게 닥친 불행을 그의 곁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껴온 저자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기억들을 풀어놓는다. 품에서 떨어진 채 기계와 주삿바늘로 연결된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엄마와 함께 있지 못했다. 아이와 엄마의 사이를 갈라놓으면서도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던 의사들, 아이의 물건들을 병실에 둘 수 없다며 돌려보내던 간호사들이 아이의 곁을 차지했다. 저자는 지금도 아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갈아입곤 했던 멸균복의 감촉, 면회 시간이 끝나 병실에서 나올 때마다 바라본 흐린 하늘, 그리고 마지막 순간 병원 복도를 비추던 햇살과 병동에 흐르던 침묵을 기억한다. 17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어도 생생히 적을 수 있을 만큼 선연한 기억은 상실의 고통이란 무엇인지,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지를 전해주며, 그 가운데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이 누구라도 공감할 보편적인 고통으로 번져가는 과정을 목격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상실감을 표현해낼 말이 없어도 결국 말하게 되는 이 정서적 추모식에서, 초대된 독자들은 저마다 겪은 상실의 기억을 떠올리며 더불어 타인의 고통까지 내면으로 끌어안는다. 비극의 주인공들에게는 시간이 정지되는 것 같다. 물론 삶은 계속된다. 현재를 저축할 수는 없다. 때로는 미래를 믿고 미래를 희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너무도 부당한 일을 견뎌내도록 운명이 지목한 이 공동체, 말 없고 부끄러움 많은 일가족인 우리는 여전히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진 상태였다. 우리 기억 속의 상처들은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122쪽 내가 아이에게 준 생명이 내 안에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아들 레미는 로르 아들레르에게 신의 깜짝선물 같은 존재였다.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던 수많은 의사들의 단언을 이기고 얻은 아이, 저자는 그 임신 기간을 ‘황홀했다’고 표현한다. 그는 배가 나온 모습을 가리지 않고 오히려 달라붙는 옷을 입어 몸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임신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과정보다는 불가피하고 피로하고 모든 의미에서 무거운 단계로 인식하던 시절이었지만, 아들레르는 임신 그리고 스스로의 ‘여성성의 변화’ 안에서 정신적, 육체적 힘을,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곤 했다. 아이를 품은 작은 요새가 된 기분으로 배 속의 아이와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주고받던 시간이 끝나고,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온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한 몸처럼 서로의 곁에 있었다. 코와 코, 입과 입, 배와 배를 맞대고서 기쁨에 겨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주 잠깐 떨어져 있던 틈을 타 불행이 끼어들어 그들을 영영 갈라놓았다. 생후 9개월의 어린 아기인 레미는 ‘급성 호흡부전’이라는 진단을 받은 이후 마지막 순간까지 집으로,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부푼 배를 앞으로 내민 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나 자신이 하나의 바위로 만들어진 것처럼 강하고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둥근 형체가, 검고 밀도 높은 작은 입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 무엇도 내게 타격을 입히지 못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야생적으로 또 야만적으로 아이를 품고 있다는 느낌, 처음으로 원래의 나보다 강해졌다는 느낌, 시작을 약속하는 저 원심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들어가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2쪽 “우리는 모두 똑같은 운명을 가진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로르 아들레르는 말한다. 그것은 바로 살아야 한다는 운명이다.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다. 그러나 그 삶은 변화하는 시간이 아닌, 정지된 채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삶이다. “우리 기억 속의 상처들은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마치 비극 속 주인공들에게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책의 마지막 장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이후를 산다는 건”으로 시작되는 발화는 반복의 움직임 가운데 서로 공명하며, 듣는 이들에게 진실한 울림을 전달한다. 이후에도 그 이후가 있다면, 그 이후를 산다는 건 “불안의 장막이 낮의 빛을 가린 어둠 속을 사는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운명’ 앞에 불행을 나눠 가진 우리는 모두 속수무책으로, 상실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이후를 산다는 건 죽음이 버린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164~165쪽 |